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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e Story

상사의 막연한 업무 지시

한 커뮤니티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눈팅만 하다 마음이 급해져서 올려봅니다.

회사에서 기저귀 시장에 대한 타당성 검토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는데..

개인적인 보고서 작성이라, 설문조사 업체에 의뢰하기가 부담스러워 설문지를 돌려보려고 합니다.

문제가 될까요?


답을 쓰려고 했는데 가입하고 보름이 지나야 댓글이나 글쓰기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쪽지 보내기도 안되서 할 수 없이 내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질문을 한 사람이 읽어보면 좋을텐데 아쉽다. 우선 이 질문에 대해 게시판에 올라온 댓글 몇 개,

** 전문업체에 맡기면 좋지요..ㅋㅋ
근데 윗분께서 검토도 아니고..한번 어떠한가 정도를 볼려고 하는거라서..
예산지원도 없이 진행하고 있어요..ㅜㅜ

** 기저귀를 사은품으로 돌리면 조사 응하시는 분들 많을거 같아요. ㅋㅋ

** 그럴만한 재력은 없어용..^^;


게시판에 올라온 몇 개의 글로 대충 상황을 예측해 봤다.

댓글에 나와 있듯 질문자의 보스는 '한번 어떠한가 정도를 볼려고' 타당성 검토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질문자는 엉뚱하게 설문 조사를 하려고 한다. 왜 설문 조사를 하려는 걸까? 예상하건데 질문자는 시장 조사나 사업 아이템 타당성 조사를 많이 해 보지 않았을 것 같다. 검색을 해 봤겠지만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했을 것이고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 타당성을 조사하려면 실 소비자에게 직접 묻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한 것 같다.

만약 그런 상태라면 설문 조사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삽질이 될 것이다. 그동안 함께 했던 직장 상사들도 내게 이런 요구 - 시장 조사나 아이템 타당성 조사 - 를 매우 자주 했다. 사회 초년 시절에는 그저 시키는대로 했다가 괜한 고생을 많이 했다. 한 시간이면 끝낼 일을 일주일 넘게 한 적도 있었다. 철야를 하며 조사를 해서 보고 했더니 한 5분 읽고 "수고했어"하면 분통이 터진다. 그런데 그건 내 잘못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막연한 업무 지시로 인해 업무 폭탄을 맞는 건 상사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내부 계약을 제대로 하지 않은 내 잘못도 크다.


상사가 시킨 일을 똑똑하게 처리하려면 그저 접수하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다시 질문을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질문을 했다.


1. 소요 시간 물어 보기

블루문 : "어느 정도 시간을 쓰면 좋겠습니까?"
보   스 : "글쎄? 크게 바쁘지 않으니 알아서 하게."
블루문 : "지금 진행하는 다른 일이 있으니 수요일 저녁에 1차 보고를 드릴 수 있습니다."
보   스 : "너무 급하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

상사는 해당 업무에 대해 정확히 언제까지 어떤 내용으로 제출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런 식의 요구는 매우 흔하다. 이런 요구를 '내부적 계약'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건 마치 계약 조건없는 계약서와 같다. 일방적인 백지 계약서를 작성할 것인가? 아니면 계약 조건을 만들 것인가? 백지 계약서에는 오직 하나의 조건이 있다. 여러분이 상사에게 시장 조사 보고서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갑'인 상사는 그 보고서를 받으면 되고 '을'인 여러분은 조건없는 조건으로 보고서를 써야 한다.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얼마의 노력을 써야 할 지 여러분이 판단해야 한다. 절대 이런 계약을 해서는 안된다.

상사에게 계약 조건을 하나씩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까다롭게 이런 저런 조건을 물어 보면 상사는 오히려 화를 낼 지 모른다, "아니 그거 하나 조사하라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상사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 그 일을 받는 부하 입장에서 답답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말 잘듣는 부하처럼 굴어서는 안된다. 다른 방식으로 계약 조건을 하나씩 만들어야 한다. 첫번째 계약 조건은 '시간'이다.

위 예제처럼 상사에게 어느 정도 시간을 써서 보고서를 작성할 것인지 묻는다. 대개는 '알아서 하라'고 말한다. 아직 우리는 시간에 대한 확약을 받지 못했다. 유능한 상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일단 이번 주말까지 보고하게. 공개된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하고 필요하다면 관계사와 미팅을 해도 좋네. 심층 분석할 부분이 있으면 따로 추가 조사를 해야 할테니 10시간 이상 소요되지 않도록 하게. 개괄적인 시장 환경을 분석하고 주요 이슈와 추가 조사할 부분을 3개 항목 이상 확보했으면 좋겠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상사는 매우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저런 대답이 나올 수 있게 질문을 해야 한다. 첫 질문에 대해 상사는 적절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시간을 제안한다. 수요일까지 1차 보고를 할 수 있다고 이야기 했다. 상사는 천천히 하라고 말한다. 그건 립 서비스일 뿐이다. 상사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타당한 지 알고 싶고 그걸 시장 조사해 보라고 부하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자신은 다른 아이디어를 또 고민해야 할테니까. 부하는 상사가 할 수 있는 시장 조사를 대신 하면 된다.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1차 보고를 하는 것이 좋다.


2. 조사 범위 물어보기

상사와 미팅이 끝난 후 30분이 지나 이메일을 보냈다.

"말씀하신 것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조사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1. 시장 규모와 경쟁 관계
2. 시장 상위 업체의 주요 상품과 시장 요구
3. 기술적 이슈와 소비자 이슈
4. 향후 시장 전망과 위기 요소

이상과 같은 항목으로 선행 조사를 할 것이고 발굴될 이슈가 있을 경우 5. 관계자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일 잘하는 상사는 추가로 조사 사항을 피드백할 것이다. 몇 번의 이메일을 더 주고 받아서 계약 사항을 정리하자. 이로써 여러분과 상사의 내부 계약서가 작성된 셈이다. 처음에 상사는 지나치듯 어떤 요구를 했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것을 계약으로 명시화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 생길 뿐이다.

조사의 방식은 문헌 조사나 검색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필요하다면 관련 업계에 있는 사람에게 이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서 조언을 구해도 좋다. 만약 자신이 전혀 모르는 분야라면 일단 관련 서적을 읽고, 관련 기사나 법규, 연구서를 검색하는 것이 좋다. 기본 지식을 쌓은 후 다음 단계로 나가 조사를 하는 것이 좋다. 이 글의 처음에 언급된 것처럼 설문 조사를 하겠다는 것은 길가는 사람을 잡고 질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 대답에 어떤 insight가 있을 리 없고 설령 있더라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현명한 상사라면 부하에게 일을 시킬 때 부하 자체를 하나의 '자원'으로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일을 시킨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일을 시키는 상사는 흔하지 않다. 이번 사례처럼 막연하게 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더욱 더 이런 환경에서 상사가 지시하는 일을 내부 계약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최소한 시간과 조사 범위를 확인함으로써 내부 계약을 명확히 하고 그에 따른 결과물로 업무 평가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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