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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e Story

갑과 을의 대화 공식

Hyejin Kwon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고운 현실... 싫다.


프로젝트의 기획 단계가 끝나고 디자인 작업을 위해 외주 업체와 계약을 진행했다. 늘 그렇듯 계약 일정을 빠듯하고 예산은 적었다. 우리는 수퍼 갑도 아니고 그냥 그런 갑이었다. 무리한 일정과 부족한 예산에 대해 설명 '드리고' 협상을 요청했다. 어? 그런데 그냥 하겠다고 한다. 협상을 다시 '요청'했으나 괜찮다고 한다. 비수기라서 인력 여유가 있어서 충분히 해 낼 수 있다고 한다.

프로젝트 중반 쯤. 디자인 시안이 몇 번 오가고 일정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프로젝트 중후반 쯤. 회사 문턱이 광나게 드나들던 디자인 회사 사장의 연락이 좀 뜸하다. 약간 불안.
프로젝트 후반 쯤. 디자인 발표 일정이 지연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프로젝트 극후반 쯤. 왜 그 디자인이 마음이 들지 않느냐고 한다.
프로젝트 종료 시점. 더 이상 디자인 시안을 줄 수 없다고 한다.

프로젝트 진행 중 3번의 시안 발표가 계약 조건이었는데 한 번 받았다. 이메일로 수정된 시안을 두 번 받았다. 그나마 뭐가 수정되었는 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네비게이션이 수정된 것을 보내달라고 하니까 첫번째 수정안은 네비게이션 테두리와 색깔이 바뀐 것이었고, 두번째 수정안은 네비게이션의 위치가 바뀐 것이었다.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서 "네비게이션 콘셉트가 다른 수정안을 보내 주세요"라고 했으나 "그게 그건데요?"라는 대답을 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소위 "비수기에 일단 오더 받아 놓고 인력 풀 유지하려는 사짜"에게 걸린 것이다. 회사에서 압박이 들어왔다. 점잖게 이야기하다 프로젝트 일정은 이미 물 건너 갔다. 어디 쓸 수도 없는 세 번째 시안을 받고 디자인 회사로 전화를 했지만 바쁘다고 나중에 통화하잖다. 알고 보니 대기업에서 한 건 제대로 물어서 사람들 전부 거기에 투입하고 있단다. 점잖게 이야기하기를 포기했다. 일단 전화 통화가 힘들어진 디자인 회사 사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계약 조건을 이야기하고 불성실 이행에 대해 항의를 했다. 이틀 후 답신이 왔다. 죄송하단다, 열심히 하겠단다. 이해해 달란다.


3개월 간 진행된 프로젝트에서 계약 위반 사항과 불성실 이행 사항을 목록화하고 이에 따른 위약금, 손해 배상 청구와 관련한 법무 법인의 입장등을 정리하여 내용 증명을 보냈다.


내용 증명을 보낸 후 디자인 회사 사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디자이너를 뽑아서 다시 진행해도 된다. 우리가 당신들을 잘못 본 것이고 그런 실수는 흔하다. 우리 잘못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진다. 그런데 앞으로 다른 회사가 당신들에게 손해를 보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 보내는 내용 증명을 바탕으로 내가 알고 있는 분들께 열심히 당신 회사를 소개할 생각이다. 영업 방해라고 나를 고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계없다. 엿 먹을 다른 회사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니까."


내용증명과 이메일을 보내고 회사에 이틀 간 휴가를 내고 휴대전화 끄고 잠수탔다. 이틀 째 되는 날 어떻게 알았는지 집으로 디자인 회사 사장이 찾아왔다. 근처 커피 숍에서 만난 우리는 별 말 없이 10분 정도 경치 감상만 하고 있었다. 우리는 적절한 타이밍이 필요했다. 그가 먼저 이야기했다, "화 많이 나셨더군요." 그가 한참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냥 그런 대화가 필요할 뿐이었다. 드디어 내가 이야기할 타이밍, "왜 이렇게 상황을 만드세요. 서로 이게 무슨 꼴입니까"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가기 마련이다. 정말 상대방을 죽이고 싶다면 이런 요식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다. 사업적인 분노를 표하고 사업적인 사과를 하고 사업적인 화해의 요식 행위를 한다. 뭐 그런 것이다.

프로젝트는 다시 진행되었고 15일 후 새로운 시안 2개 중 하나를 선택했다. 프로젝트는 전체적으로 2개월 지연되었고 이에 대해 쌍방이 조금씩 감내하고 비용을 조정했다. 그 디자인 회사는 우리 회사와 새로운 계약을 했고 이후 오랫동안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함께 했다. 그 디자인 회사의 직원이 우리 회사로 취업을 하기도 했고, 우리 회사의 마케팅 담당자가 그 회사로 가서 일하기도 했다. 물론 다시 그 회사로 내용 증명을 보내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트위터에 올라온 짧은 글을 읽고 험한 말을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프로젝트가 지연되기 전에 우리 회사의 보스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이본부장, 저 회사 나한테 맡겨봐. 고운 말로 하니까 이렇잖아." 나는 보스에게 "험한 말하면 일은 쉽게 될 지 몰라도 결국 평판이 나빠진다. 그냥 내가 하는 걸 지켜보라."고 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결국 내가 험한 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게 옳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그런 방법을 쓰지 않을 것이다. 다른 여러가지 협상의 방법을 몰랐던 시절이었다. '갑'이 계약서 조항을 들먹이며 '을'을 협박하는 건 정말 저급한 협상의 방법이다. '갑'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건 말이 안된다. 그 시절을 돌이켜 봤을 때 나는 '갑'으로서 좀 멍청하게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곱다... 마음에 와 닿는 말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현명하게 일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전가의 보도처럼 험한 말을 꺼내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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