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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Insight

이념으로 갈라진 한국 인터넷

표현의 자유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는 미국, 인터넷도 그와 크게 다를 바 없어서 각종 규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표현의 자유를 더욱 중요시하는 기조가 유지되고 있다.





1인 미디어의 대표체라고 할 수 있는 블로그(Blog)가 최초로 나왔고 이제 기존 미디어의 대안체로 인정될 정도로 활발한 미디어 활동이 전개되고 있는 곳이 미국이다. 기업들의 부정한 행태가 블로그를 통해 내부 고발되는 경우도 흔하고 정치인의 비리가 밝혀 언론의 주목을 받는 블로그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가 철저하게 보장되는 미국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고 블로그를 쓰는 것은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자유롭게 보인다. 그러나 미국에서 블로그를 쓸 때 절대 언급해서 안되는 몇 가지 '터부(taboo)'가 있다. 이 터부는 단지 언급해서 안될 뿐만 아니라 언급할 경우 법률적 제재를 즉시 받을 수 있다.

바로 "인종 차별"과 "아동 성학대"가 그것이다. 이 둘에 대한 미국민과 법률의 제재는 매우 엄격하다. 미국민들이 스스로 지키려는 표현의 자유는 이 두 가지 '터부'보다 상위에 있지 않다. 실제로 미국에서 제공하는 많은 커뮤니티는 '인종차별에 대한 콘텐츠를 올린 경우 즉시 사용권이 박탈된다'는 표현을 사용자 약관에 포함시키고 있다.


미국 페이스북의 사용자 약관

■ 터부(Taboo)

미국의 경우 다민족 국가며 또한 흑인 인권 운동과 같은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인종차별적 콘텐츠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고 볼 수 있다. 아동 성학대에 대한 부분은 미국의 사회문화적 병리현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 주요한 웹 사이트의 사용자 약관을 읽어 봐도 사회문화적 터부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을 찾기 힘들다. 언뜻 볼 때 한국이 미국에 비해 웹 사이트에서 표현의 자유에 더욱 관대한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의 포털에서 카페나 블로그를 운영해 본 사람들은 사용자 약관에 표시되지 않은 수 많은 '터부'가 존재함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터부 중 최근 가장 심각한 것은 '이념'이라는 터부다. 한국의 이념에 대한 터부는 다른 터부와 마찬가지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과 거리가 멀다. 토론을 통해 해결되지 않는 이념에 대한 터부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우연히 이념의 터부를 건드렸다 큰 낭패를 보는 경우는 지금도 흔히 찾을 수 있다.


네이버의 사용자 약관

지난 10월 23일 고재열의 독설닷컴이라는 블로그에서 <내가 본 북한의 10대 얼짱>이라는 글을 공개했다. 이 글은 시사IN의 기자인 고재열씨가 최근 평양을 방문하며 만난 북측 여성의 사진을 공개해 그들의 미모에 대해 가벼운 톤으로 언급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글에서 사용된 '동무'라는 표현이었다. 고재열씨는 평양의 호텔과 음식점 등에서 만난 북측 여성을 소개하며 그들의 이름 뒤에 '동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글이 다른 블로그를 통해 확산되며 며칠 사이 280개에 달하는 댓글이 달렸는데 그 중 많은 댓글이 '왜 동무라는 표현을 사용하느냐?'는 항의였다.

한국에서 '동무'라는 표현은 그 본래적 의미와 아무런 상관없이 북측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며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곧 친북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해석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한국에서 '동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념적 터부라고 말할 수 있다.

고재열의 독설닷컴, http://poisontongue.sisain.co.kr/325

평양을 방문한 스케치를 전달하는 본 글의 내용과 관련없이 많은 댓글이 '동무'라는 표현을 사용한 블로그에 대한 비난과 욕설 그리고 그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의 댓글로 이어졌다.

이런 댓글에 대해 고재열씨는 북측에서 '접대원 동무'라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한국에서 그 표현을 옮기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항변하고 있다. 그는 한국이 '동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폐쇄적인 나라냐고 반문하고 있는데 이에 동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는 고재열씨의 경우처럼 한국에서 '동무'라는 단어는 한국전쟁과 분단상황, 오랜 반공멸공 교육을 통해 한국민에게 각인된 일종의 '터부'라는 점이다. 그가 어떤 이유로 '동무'라는 표현을 사용했든 간에 여전히 많은 한국민들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데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심지어 빨갱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동무라는 표현에 항의하는 댓글

■ 좌파와 우파

지난 대통령 선거 이후 미디어를 통해 '좌파'와 '우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비율이 급증했다. 현재 약 110개의 미디어사로부터 뉴스를 공급받고 있는 네이버 뉴스에서 '좌파'라는 단어를 사용한 뉴스를 검색한 결과는 흥미롭다.

1997년 1월 1일부터 대통령 선거 직전인 2007년 12월 18일까지 네이버 뉴스에 저장된 기사 중 '좌파'라는 단어를 포함하는 기사는 모두 27,608건이었다. 반면 이명박 현 대통령의 당선된 후 11개월 사이에 네이버 뉴스에서 '좌파'라는 단어를 사용한 뉴스의 검색 결과는 11,161건에 달한다.

물론 이 기사의 숫자는 통계상 오류가 있는 것이지만 실생활에서 좌파와 우파라는 표현을 과거에 비해 훨씬 자주 듣는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언론인은 사석에서 "좌우의 대립은 과거 정권이 만든 것이다"라며 좌파적 정책을 폈던 노무현 정권의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문제는 좌파와 우파에 대한 터부가 비정상적인 비난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사례로 든 '동무'라는 단어에 대하여 일부 사용자들이 격렬하게 반응한 것과 비슷한 이유다. 현재 한국에서 좌파와 우파라고 누군가를 부를 때 그것이 정치적인 노선으로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의도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상대방을 매도하고 비난하기 위해 사용되는 매우 감정적인 단어로 변질되어 있다. 2008년, 한국에서 가장 큰 터부는 파시즘이나 인종차별이나 아동 성학대나 가정 폭력이나 성차별이 아니라 '이념'이다.

최근 한 여당 정치인과 대화에서 그는 "네이버는 나름대로 정돈이 되었지만 다음은 여전히 좌파적 성향이 강하다"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서 한국은 아직도 정치적, 이념적 투쟁이 가장 중요한 이슈인 사회라는 생각을 했다.

한반도의 상황이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북측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주장을 받아 들이더라도 현재 한국민들이 경험하고 표출하는 이념적 편 가르기는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을 한다. 또한 그런 이념적 편 가르기가 인터넷의 곳곳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지난 5, 6월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시기에 포털을 비롯한 각 미디어 사이트들은 마치 "좌파"와 "우파"의 전쟁터와 같았다. 그들은 상대방을 "촛불좀비", "우파꼴통"이라고 서로 비난하며 수 많은 콘텐츠와 댓글을 생산했다. 마치 이념 논쟁과 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1948년 쯤으로 한국의 시간이 회귀한 느낌이었다.

이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며 한국에서 이념적 단어나 주제를 공개적으로 설파하는 것은 불꽃만 튀어도 거대한 산불로 번져 버리는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터부 중의 터부가 되었다.


한국의 인터넷 인프라는 전 세계 어떤 국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선진적이다. 그러나 그것을 향유하는 우리는 여전히 수 많은 터부 속에서 할 말과 못할 말을 스스로 검열하며 살고 있다. 최첨단 시스템 위에서 냉전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검열되는 한국의 인터넷을 선진적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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