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Iguacu ONLY

디자인(design)에 대한 잘못된 이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의 직업을 묻곤 한다. "디자이너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그 사람의 차림새를 잠깐 살펴 본 후 "옷 만드세요?" 혹은 "인터넷 회사 다니세요?"라고 되묻는 경우를 자주 본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무엇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지난 10년 사이 웹 서비스 관련 업계에서 '디자인'은 오히려 '기획'이라는 의미에 훨씬 가까운 것으로 바뀐 것 같다. 나 또한 내 직업을 곰곰히 따져보면 웹 서비스 컨설턴트가 아니라 웹 서비스 디자이너로 정의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한다.

90년대 후반 인터넷 회사에 들어갔을 때 '디자인'은 웹 사이트에 사용되는 이미지를 그리거나 편집하는 일을 의미했다. 몇 년 지나자 웹 사이트에 그런 이미지를 적절하게 편집하여 위치를 잡는 간단한 코딩 - 하드 코딩 - 을 하는 역할이 부여 되었고 그런 사람을 '웹 디자이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플래시와 같은 인터랙티브 미디어를 다루는 것도 '웹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 되었다. 그 와중에 CSS나 간단한 스크립트, 표준 마크업을 다루는 것도 '웹 디자이너'의 업무에 포함되는 걸 지켜봤다. 지금은 주요하게 다루는 도구에 따라 세분화된 측면이 있지만 여전히 그런 여러가지 도구를 다루고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을 '웹 디자이너'라고 부르는 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창업을 하고 여러 회사의 다양한 개발 환경을 경험하면서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다르게 쓰이는 것을 자주 발견했다. 대표적인 것이 게임 회사다. 게임 회사에서 '게임 디자이너'는 게임 그래픽을 만드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게임을 기획하는 사람을 말한다. PD라고 부르는 곳도 있고, PD와 디자이너가 따로 있는 곳도 있다. 어쨌든 게임 업계에서 '게임 디자이너'는 그래픽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디자인'에 대한 협소한 정의 혹은 직업 경험에 의한 잘못된 판단 때문에 자주 오해를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멋진 공간을 창출하는 유명한 건축 디자이너가 유아 교육 시스템을 제작하는데 참여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 디자이너는 건축을 통해 사람과 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유아가 건강하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시스템에 참여하여 직관적인 견해를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 게다가 그 디자이너는 자신의 의견을 눈에 보이는 어떤 것 - 그림이든, 목업이든, 프로토타입이든 - 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 사람이 유아 교육 시스템에 참가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건축 디자이너'를 건물을 기획하고 도안을 그리는 사람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순전히 내가 잘못된 인식을 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웹 서비스 기획자들이 자신이 기획해야 하는 사이트를 파워포인트에 그리고 그것의 외형을 웹 디자이너에게 맡겨 버리는 행동이 매우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웹 디자이너들이 왜 자신을 그래픽 디자이너로 취급하는 지 답답해하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개발자들이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만든 사이트의 코더로 전락하고 있는 문제도 파악했다. 그래서 늘 세 주체가 함께 웹 서비스를 기획하도록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고 기획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물론 늘 그들은 싸웠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잘못한 것을 명확히 알게 된다. "웹 서비스 기획 회의를 합시다"라고 세 주체를 모은 게 잘못이다. "웹 서비스 디자인을 합시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기획자에게 명확히 교육했어야 했다. 디자이너에게도, 개발자에게도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갖는 함의를 설명하고 이해하도록 시간을 줬어야 했다. 디자인은 '디자이너'라는 직무와 직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토론하며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걸 말했어야 했다. 그래야 "나는 기획을 할테니 당신은 디자인을 하고 당신을 개발을 하시오" 따위의 초급자 수준의 협업 관계를 탈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회하지만 지금이라도 주변의 기획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더 자주해야 할 것 같다,
"너는 기획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웹 서비스를 디자인 하는 사람" 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