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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아빠와 11살 딸의 쇼핑

2주일 전 일요일 딸과 함께 보낸 1차 대장정 이후 

오늘 2차 대장정을 시도했습니다. 이번엔 꼬박 11시간을 달렸습니다.

 

아침 9시 30분에 집에서 출발하여 귀가하니 저녁 8시 30분.

대략의 경로는 반포동 > 한옥마을 > 대학로 > 명동 순서.

 

원래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한바퀴 돈 후 한적한 찻집에서 딸아이와 차를 

한 잔 하고 점심을 먹고 귀가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저녁 무렵 아이에게 물었죠.

 

"너 명동 안 가 봤지? 가 볼래?"

"콜!"

 

아... 춥다고 귀찮다고 집에 가자고 할 줄 알았던 제가 저능아였습니다.

명동 밀리오레 앞 도착.

인증 사진 한 장 찍고 새로 생긴 유니끌로 빌딩으로 입성.

 

이제 11살이 되는 아이와 함께 옷 쇼핑을 시작합니다. 

전 날 거의 잠을 자지 못한 관계로 체력이 바닥을 치고 있었지만

딸 아이를 위한 옷 장만 해야 한다는 각성 상태가 되자

마린이 스팀팩 연속으로 세 번 맞은 것처럼

건물 전층을 헤집고 다니며 맞는 옷을 색출하기 시작합니다.

 

딸 아이를 피트 모델처럼 이것도 입혀 보고 저것도 입혀 보고

세 시간 가량 작업을 한 끝에 마침내...

바지 2벌과 상의 1벌을 간택합니다.

 

제가 좀 까탈스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딸의 옷을 고르는 입장이 되니 거의 슈스케 심사 위원 수준이 되는 것 같더군요.

다행히 아이는 즐거워 했습니다.

 

그런데 좀 슬펐던게...

딸아이가 또래보다 건장하긴 하지만 배가 좀 나온 편이라

장난삼아 '돼지야~'라고 자주 불렀는데

막상 바지를 입히려고 하니...

허리가 안 맞아서... ㅜ.ㅜ

 

청바지 하나는 어떻게 아동복 코너에서 구했지만

다른 하나는 여성복 코너에서 허리 맞는 걸로 구해서

기장 줄이기를 했습니다. 

 

여성복을 잘 몰라서 매장 여성 점원에게 사이즈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데 그걸 듣고 있던 딸아이가 대뜸,

 

"내가 돼지라서 그래요!"

 

라고 하더군요. 화들짝 놀라서 아이를 데리고 구석으로 가서

안아주면서 "그런 말 남한테 하면 안되. 내가 널 정말 돼지라고

생각하면 예쁜 옷 사주려고 이러겠니. 넌 정말 예쁘단다."라고

위로했지만 한 동안 굳은 표정이었답니다. ㅜ.ㅜ 

 

 

어쨌든 예산도 없이 갑자기 시작한 쇼핑이라 저렴한 옷 몇 벌만

샀지만 아이가 어찌나 즐거워하던지 오른발과 허리의 통증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옷 수선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저녁 먹으려고 

걸어가는데 앞에 대형 신발 매장이 보이더군요. 아이를 앉혀 놓고

예쁘장한 캔버스 한 개를 가져와 신겨 줬습니다. 

 

"이거 마음에 들어? 청소년들의 로망이라고 하는 신발이야."

 

마음에 든다길래 진열되어 있는 캔버스 신발장 앞으로 가서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 고르라고 했습니다. 한참 생각하더니

캔버스 베이직 모델이 좋다고 합니다. 아이가 흰색을 좋아하지만

가장 저렴한 모델이기도 합니다. 감사한 마음과 동시에 아이가

이제 어리기만 하지 않다는 걸 깨닫습니다. 대신 이렇게 약속합니다,

 

"캔버스의 핵심은 커스터마이징이야. 내일 나와 함께 이 신발에 예술을 해 보자꾸나."

 

계산을 하는데 계산대 옆에 있는 예쁜 아동용 신발을 물끄러미

보고 있습니다. 사고 싶냐고 하니 아니라고 합니다.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니 발이 240mm만 되면 아빠가 신고 있는 발리 스니커즈를 선물해 주마.

한 번 사면 아까워서 10년 신는단다... 일단 지금은 돈이 없다'

 

 

딸과 쇼핑을 하며 문득 엄마가 해야 하는 역할과 아빠의 역할을 굳이 분리할

필요가 있나 생각했습니다. 엄마가 바빠서 딸과 함께 한 번도 옷을 사러 가지

못하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서 입힌다고 탓하기 보다 아빠가 시간되면 

같이 가면 되는 거죠. 게다가 아빠가 좀 더 패션에 관심이 있다면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요. 굳이 그걸 엄마와 아빠의 역할로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소맥 네 잔째 마시며 아빠가 하면 어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가정사라 생략.

 

어쨌든 우리 딸 대충 입혀도 예뻤는데 조금 신경 더 쓰니 훨씬 예쁘네.

근데 운동화 끈 묶는 거 지금 다섯번 째 물어 보러 왔는데

여덟 번까지는 봐 줄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