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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uacu ONLY

웹 기획자 되기

1995년 웹을 처음 접한 이후 13년 간 웹과 관련된 일을 하며 나를 부르는 호칭이 여러 번 바뀌었다. 그런데 그 이름 중 내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웹에 관심을 갖던 초창기 학생이었던 나는 웹이라는 새로운 인터페이스와 브라우징을 통한 손쉬운 콘텐츠 입수에 흥분해 있었고 그것을 전문 잡지나 신문 등에 기고를 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책을 두 권 쓰기도 했는데 그 이후 더 많은 잡지에 글을 썼다. 당시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테크라이터'라고 불렀다.





몇 년 후 졸업을 하고 웹 서비스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들어갔는데 그 회사에서 새로운 웹 서비스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하는 나를 '웹 마스터'라고 불렀다. 이후 전망을 다소 수정하여 신규 사업에 걸맞는 웹 서비스를 발굴하고 조직하는 일을 했는데 사람들은 나를 '신규사업기획자'라고 불렀다. 또 몇년이 지났고 나는 두 군데 정도의 회사에서 새로운 웹 서비스를 만들었다. 그 회사의 사장과 협의를 하여 새로운 사업에 필요한 웹 서비스를 총괄 기획, 개발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 때 나에 대한 호칭은 따로 없었다. PM(Project Manager)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실제 PM은 따로 있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업본부장'이라고 불렀는데 그것도 적절하지 않았던 것이 새로운 웹 서비스를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실제 개발의 핵심적인 부분에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3년 간 나는 새로운 웹 서비스를 만드려는 사람들을 돕고 조언하며 개발의 방향을 제시하는 '웹 서비스 컨설턴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제대로 된 호칭은 아닌 것 같다. 컨설턴트라는 직업의 정의를 따르자면 조언과 교육의 역할이 중요한데 나는 실제로 새로운 서비스의 개발을 핵심 위치에서 지도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동안 웹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만 어떤 순간도 나의 정체성을 정확히 표현하는 호칭을 들어 본 적 없다. 바보같이 들릴 지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직업의 정체성이 뭔가 고민하고 있다.


10여년 전 '웹 마스터'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 있다. 그들은 웹 마스터라는 직업의 정의와 해야 할 일, 미래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했다. 그런데 토론 중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웹 마스터 모임이라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참석자들은 웹 마스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웹 사이트 개발도 웹 마스터 중심이어야 하고, 운영도 웹 마스터 중심이어야 하고, 마케팅도 그렇고, 프로모션도 그렇고... 모임이 끝나고 뒷풀이 자리에서 발표자들에게 질문을 했다, "혹시 이 모임이 수퍼 히어로 모임이었나요?" 그 모임에 다시 나가지 않았다.

당시 웹 마스터라고 하면 웹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프로그래밍도 하고 디자인도 하고 운영도 하는 그런 역할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도 프로그래머가 있었고, 디자이너도 있었고, 기획자도 있었고, 마케터도 있었고, 프로모터도 있었고, 경영진도 있었다. 그럼 웹 마스터는 무엇인가? 시간이 흐른 후 '웹 마스터'라는 직종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시절을 돌이켜 볼 때 웹 마스터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릴 수 있었다. 소규모 영세 웹 사이트를 운영하는 신생 기업에서 웹과 관련한 전반적인 사항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웹 마스터'라고 불렀던 것이다. 웹의 초창기에는 하나의 웹 사이트를 만드는 것을 한 개인이 해 낼 수 있는 환경이었다. 나 또한 몇몇 웹 사이트를 혼자 만들었고 혼자 운영했다. 야후!와 구글의 초기 버전도 마찬가지다. 그 당시에는 혼자 혹은 소수의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웹 사이트나 웹 서비스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웹이 산업화되고 웹 서비스의 규모가 커지면서 혼자 만들 수 있는 웹 서비스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웹이 산업화된다는 것은 한 사람의 능력 이상이 필요한 영역이 점점 늘어간다는 소리며 하나의 웹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웹을 기반으로 사업을 하려는 모든 회사가 웹 서비스 개발 인원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기존에 다른 사업을 하고 있는 회사가 웹을 기반으로 사업을 확대하려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 이런 회사의 경우 웹에 대한 전문 인력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새로운 인력을 뽑자니 웹과 자기 회사의 사업적 관계를 확신하기 힘들었다.

이런 요구에 의해 웹 사이트나 서비스를 대신 만들어 주는 웹 에이전시 산업이 부흥하기도 했다. 웹 서비스가 정교화되고 복잡하며 보다 높은 기술적 수준을 요구할수록 애매한 직종인 웹 마스터는 설 자리를 잃었고 현재 웹 마스터라는 호칭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대신 웹 기획자나 웹 마케터, 웹 개발자, 웹 디자이너와 같은 신규 업종이 생겨났다. 새로운 직종들의 접두사는 모두 '웹'이다. 때문에 이 직종들에 대한 정의는 아주 간단하다. 웹 기획자는 "웹이라는 환경에서 기획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웹 마케터는 "웹이라는 환경에서 마케팅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웹"은 도대체 뭐지?

"웹은 도대체 뭐지?"라는 질문에 대해 정확히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터넷의 한 프로토콜로써 브라우저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네트워크'라고 멋지게 정의해 버릴 수 있지만 그것으로 불충분했다. 하지만 충분한 논의가 없는 상태에서 웹은 급격히 산업화되었고 이미 웹의 사용자와 웹을 통해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수억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개념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온 천지에 돈 벌 수 있는 기회가 널려 있는데!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닷컴 버블이 닥쳐왔다.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웹에 기반한 많은 사업자가 도산하거나 파산했고 투자자들은 원금을 회수하기는커녕 쪽박을 차는 경우가 발생했다. 몇년의 암흑기가 흐르는 동안 일부 사람들이 웹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웹 2.0'이라는 횃불이 밝혀졌다. 웹은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주장하며 -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을 점잖게 하는 말이다 - 웹에 기반하여 성공한 사업자들의 성공 신화를 널리 퍼뜨리기 시작했다. 웹은 다시 생명을 얻었다. 그런데 "웹은 도대체 뭐지?"

웹에 대한 정의는 매우 간단하다. 다만 웹은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산업적으로 이해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정의가 복잡해진다. 게임 산업에서 이야기하는 웹과 탄광 산업에서 이야기하는 웹은 전혀 다르다. 게임 산업에서 웹은 새로운 게임을 배포하고 가입자를 확보하는 가장 유력한 채널이지만 탄광 산업에서 웹은 탄광 산업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는 웹 페이지 몇 개를 의미할 뿐이다. 게임 산업에서 웹은 모바일, IPTV, 임베디드 디바이스 등 다양한 영역으로 게임 콘텐츠를 확대할 수 있는 멀티 플랫폼이다. 탄광 산업에서 웹은 그런 의미가 없다. 게임 산업에서 웹에 대해 연구하고 개발하는 수 많은 인력이 존재한다. 탄광 산업에서 웹과 관련한 인력은 사업장의 컴퓨터 수리를 함께 하는 사람일 수 있다. 웹과 관련한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웹'이라는 큰 개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큰 산업 부문에서 개별성이 있다. 그 개별성 때문에 웹과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과거 10년 전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공통점을 찾기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웹 기획자를 대상으로 한 강연을 자주 했었는데 가장 난감한 경우가 이런 제목의 강연을 할 때다,

"성공적인 웹 사이트 운영을 위한 노하우"

이런 제목은 매우 매력적이다. 강연을 의뢰하는 기업은 항상 이런 식으로 매력적인 제목을 뽑아서 많은 사람을 모으려고 한다. 그 제목에 반대하며 좀 더 실질적인 제목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온라인 신문 사이트의 구독자 확대를 위한 부가 서비스 기획 방안"

그 러나 이런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너무 구체적이어서 올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제목은 매력적인 것으로 정해지고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모인다. 나는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강연장에 입장해서 인사를 하고 강연을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 내 강연은 주제를 잃고 헤매기 시작한다. 강연장에 앉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석에서 졸고 있는 사람들도 보이고 불만에 가득찬 표정으로 낙서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주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니 이미 강연은 끝장난 것이다. 이런 강연을 몇 번 하고 나면 누구도 다시는 강연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다.

아마 10년 전이라면 애매한 제목의 강연이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그저 웹 마스터라고 개념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직종이 존재했을 무렵엔 이렇게 이야기해도 먹히고 저렇게 이야기해도 먹히는 '일하는 방법'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이야기다. 이미 웹은 충분히 산업화되었고 산업의 개별적 특성에 따라 웹이 적용되는 범위와 형태는 세분화되어 버렸다. 웹 마스터라는 직종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이제 웹은 산업 부문에 따라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웹의 공통적 제어 방법"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허구다. 만약 다음과 같은 단어가 포함된 웹과 관련한 강연이나 컨퍼런스가 있다면 절대 참석하지 말아야 한다.

- '모든',  '절대적인', '성공하는', '실패하지 않는', '최신의'


이 즈음이면 웹의 기원이 무엇인가 고민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웹의 기원을 알고 싶다면 창안자의 이야기를 듣는 게 바람직하다. 해설서보다 원본을 먼저 보라는 조언을 또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웹(World Wide Web)의 개념을 제안한 사람은 누구인가 검색해 보라. 검색에서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팀 버너스 리라는 이름만 찾았다면 할 수 없다. 하긴 역사는 가장 뛰어났던 사람만 기억하는 법이다. 사람들은 토머스 앨바 에디슨이 1000개가 넘는 특허를 등록했다는 것만 기억하지 그의 특허를 위해 헌신했던 수천 명의 다른 연구자들은 전혀 모르지 않나. 에디슨의 발명 중 대부분은 다른 연구자들이 최초 발견했던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어쨌든 웹의 개념을 최초 제안한 사람은 팀 버너스 리라고 해 두자.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근처에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던 다른 학자들이 소송을 걸었을텐데 아무런 이야기가 없으니 그냥 그렇게 인정하자. 팀 버너스 리가 1990년에 CERN에서 일할 때 웹의 개념을 세우고 그 다음 해인 1991년 유즈넷의 뉴스그룹인 "alt.hypertext"에 웹에 대해 처음 소개한 글은 이런 것이었다. 고리타분한 내용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웹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니 반드시 읽어야 한다.

"n article <6...@cernvax.cern.ch>
I promised to post a short summary  of the WorldWideWeb project.  Mail me with any queries.

                WorldWideWeb - Executive Summary

The WWW project merges the techniques of information retrieval and hypertext to make an easy but powerful global information system.

The project started with the philosophy that much academic information should be freely available to anyone. It aims to allow information sharing within internationally dispersed teams, and the dissemination of information by support groups.

     Reader view

The WWW world consists of documents, and links.  Indexes are special documents   which, rather than being read, may be searched. The result of such a search is another ("virtual") document containing links to the documents found.  A simple protocol ("HTTP") is used to allow a browser program to request a keyword search by a remote information server.

The web contains documents in many formats. Those documents which are hypertext,  (real or virtual) contain links to other documents, or places within documents. All documents, whether real, virtual or indexes, look similar to the reader and are contained within the same addressing scheme.

To follow a link,  a reader clicks with a mouse (or types in a number if he or she has no mouse). To search and index, a reader gives keywords (or other search criteria). These are the only operations  necessary to access the entire world of data.

     Information provider view

The WWW browsers can access many existing data systems via existing protocols (FTP, NNTP) or via HTTP and a gateway. In this way, the critical mass of data is quickly exceeded, and the increasing use of the system by readers and information suppliers encourage each other.

Making a web is as simple as writing a few SGML files which point to your existing data. Making it public involves running the FTP or HTTP daemon, and making at least one link into your web from another. In fact,  any file available by anonymous FTP can be immediately linked into a web. The very small start-up effort is designed to allow small contributions.  At the other end of the scale, large information providers may provide an HTTP server with full text or keyword indexing.

The WWW model gets over the frustrating incompatibilities of data format between suppliers and reader by allowing negotiation of format between a smart browser and a smart server. This should provide a basis for extension into multimedia, and allow those who share application standards to make full use of them across the web.

This summary does not describe the many exciting possibilities opened up by the WWW project, such as efficient document caching. the reduction of redundant out-of-date copies, and the use of knowledge daemons.  There is more information in the online project documentation, including some background on hypertext and many technical notes.

     Try it

A prototype (very alpha test) simple line mode browser is currently available in source form from node  info.cern.ch [currently 128.141.201.74] as

        /pub/WWW/WWWLineMode_0.9.tar.Z.

Also available is a hypertext editor for the NeXT using the NeXTStep graphical user interface, and a skeleton server daemon.

Documentation is readable using www (Plain text of the instalation instructions is included in the tar file!). Document

         http://info.cern.ch/hypertext/WWW/TheProject.html

is as good a place to start as any. Note these coordinates may change with later releases.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Tim Berners-Lee                 Tel:    +41(22)767 3755
WorldWideWeb project            Fax:    +41(22)767 7155
C.E.R.N.                        email:  t...@cernvax.cern.ch
1211 Geneva 23
Switzerland "


이 쉬운 문장을 굳이 번역할 생각은 없다. 이 문장에 대한 번역은 일종의 신성 불가침이다. 팀 버너스 리가 뉴스그룹에 올린 글의 내용은 일종의 종교 창시자가 내린 10계명과 같다. 그가 내린 계명은 모두 이뤄졌다,

- 웹의 콘텐츠는 읽기만 할 게 아니라 검색도 될 것이다 : 구글이 최선봉에서 구현했다
- 여러가지 포맷의 문서가 있을텐데 어쨌든 똑같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브라우저와 OS의 합작으로 해결되었다
- 그냥 클릭만 하면 모든 데이터을 읽을 수 있다 : 물론이다
- 다른 프로토콜(FTP, NNTP)의 데이터도 읽을 수 있다 : 물론이다
- 웹 페이지를 만드는 것도 정말 쉽다 : 매일 수백만 개의 새로운 웹 페이지가 만들어지고 있다, 블로그를 보라!
- 모든 형태의 데이터를 공유하려면 애플리케이션의 표준이 필요하다 : Flex를 보라
- 이게 끝이 아니다 : 나도 안다

그 는 이런 계명 뿐만 아니라 1991년 시점에서 브라우징할 수 있는 알파 버전의 브라우저와 테스트 서버와 테스트 파일까지 공개해 두고 있다. 이런 노력을 했으니 팀 버너스 리는 웹의 창시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나머지 몇 명은 대충 넘어가도 좋다. 팀 버너스 리의 뜻을 따라 수 많은 사람들이 웹이라는 공간에 뛰어 들어 개발과 개선과 혁신을 거듭했다. 그리고 지금의 웹이 존재하고 있다. 이제 웹의 근본을 알았으니 다시 웹에서 일하는 사람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웹기획자란 무엇인가? 1999년 쯤 이 직종을 처음 들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웹 기획자'라는 표현에 대해 매우 안타까운 느낌이다. 웹을 뭐 어떻게 기획하겠다는 것인가? 웹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인가? 팀 버너스 리의 연구 과제를 이어 받아 웹을 좀 더 개선하려는 사람들인가? 아니다. 현실에서 '웹 기획자'는 '웹 사이트 기획자'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웹 기획자라는 단어에 뭔가 더 큰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착각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는 일을 뭔가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초창기 웹 기획자라는 단어를 만든 몇몇 개념없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허튼 착각이 계속되는 게 문제일 뿐이다.

웹 기획자는 학술적인 측면에서 천체 물리학자나 상담 심리학자나 해양 생물학자와 비슷한 것이다. 기획자라는 범주에서 '웹'이라는 전문 분야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만약 자신을 '웹 기획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팀 버너스 리처럼 웹이라는 프로토콜이나 시스템에 대해 기획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대학원으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

현재 스스로 '웹 기획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대부분은 '웹 사이트 기획자'다. HTTP 프토토콜로 접근할 수 있는 웹 페이지를 기획하는 사람이다.

<html> 안녕! </html>

이 런 HTML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이면 모두 웹 사이트 기획자다. 저 한 문장을 저장하고 확장자를 html로 바꾼 후 웹 서버에 올리면 바로 웹 페이지가 되기 때문이다. 웹 사이트 기획자는 이런 식으로 HTML을 이해하고 그것을 웹이라는 공간에 노출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웹 사이트에 대한 요구가 더 복잡해지면 더 많은 HTML 코드를 알아야 할 것이다. 스크립트가 들어갈 수도 있고, 데이터 전달 포맷이 들어갈 수도 있고, 플래시와 같은 리치 미디어가 들어갈 수도 있지만 결국 웹 사이트 기획자는 '출력'에 관계된 일을 기획하는 사람이다. 잡지로 치면 레이아웃 기획자다.

그런데 많은 웹 기획자들은 이 정도의 일이 자신이 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웹 기획자들은 웹 사이트에 대한 콘셉트와 형식과 사용자 편의성과 운영에 대한 기획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당신의 정체성은 '웹 콘텐츠 기획자'다. 웹 사이트의 콘셉트와 형식과 편의성과 운영은 '콘텐츠'에 의해 지배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신은 콘텐츠 기획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도 기획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말이다. 예를 들어 사용자들이 올린 사진 이미지를 조합하여 동일한 취미를 갖는 사람을 친구로 엮어 주는 서비스를 기획하는 웹 기획자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런 새로운 서비스를 기획하는 사람들은 '웹 서비스 기획자'라고 부를 수 있다. 서비스의 개념을 소프트웨어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서비스는 소프트웨어의 일부분으로써 동작하는 서비스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용자들이 참여하여 만족하고 반복 사용하는 웹 페이지 전반을 이야기한다. 웹 서비스는 소프트웨어를 활용하여 웹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웹 페이지 자체가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웹 서비스 기획자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그런 결정권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웹 서비스 기획자다. 웹 서비스 기획자는 사용자의 사진 이미지를 저장하고 공유하는 방법으로 파일 업로드 도구를 직접 개발하도록 기획할 수도 있고, 이미 개발된 모듈을 구매할 수도 있고, 플리커나 네이버와 제휴하여 그들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 가장 '합리적'인가 선택하는 권한이 있으며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웹 서비스 기획자다.


웹 기획자는 허망한 단어다. 웹에 대한 개념이 산업적으로 너무나 세분화되었기 때문에 이제 웹 기획자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자신이 원하는 바에 의해 웹 사이트 기획자가 될 수도 있고, 웹 콘텐츠 기획자가 될 수도 있고, 웹 서비스 기획자가 될 수도 있다. 각각에 대해 산업이 요구하는 역량와 경험과 지식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웹 사이트 기획자도 모든 웹 사이트에 대한 기획을 할 수 없다. 이 평범한 진리를 웹 기획을 하려는 사람들은 자주 잊는다. 웹 사이트든 웹 콘텐츠든 웹 서비스든 우리는 제한된 부분에 대하여 기획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모바일 웹 사이트를 성공적으로 기획한 기획자가 모든 웹 사이트를 성공적으로 기획할 수 있는가? 게임 웹 콘텐츠를 성공적으로 기획한 기획자가 모든 웹 사이트를 성공적으로 기획할 수 있는가? 커뮤니티 웹 서비스를 성공적으로 기획한 기획자가 모든 웹 사이트를 성공적으로 기획할 수 있는가? 모두 NO라고 대답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왜 항상 '그럴 수도 있다'라고 거짓말하는가?


그렇다면 모든 웹 기획자들은 자신이 성공한 한 분야에 머물러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커뮤니티 웹 사이트를 성공적으로 만든 기획자가 상거래 사이트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0%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개념의 혁신"

지 금까지 우리는 어떤 회사에 소속된 '기획자'라는 관점에서 웹 기획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 개념 속에서 웹 기획자는 늘 자기 한계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 무엇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누구와 만나든 늘 '회사'와 그 회사의 '목표'에 제약되는 생각과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아는 어떤 기획자는 한 회사에서 10년을 일하고 있다. 그는 매년 회사에서 수 없이 많은 제안을 하지만 늘 회사의 주 수익 모델인 웹 사이트의 기획만 하고 있다. 그의 연봉은 계속 높아지고 있고 회사의 매출은 늘어가고 있지만 그는 오늘도 자신의 기획 역량이 회사 내부에 머물러 있음에 침통해한다. 그는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생각하는 그의 유일한 잘못은 현재의 위치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안정적이며 편안하고 미래가 보장되는 위치를 유지하는 것은 곧 변화하는 미래를 스스로 제거하는 것이다. 그는 웹 기획자로서 변화를 거세하며 변화를 바라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웹 기획자가 경쟁의 정글에 스스로 던져 버릴 각오가 있다면 이제부터 자신을 '웹 서비스 디렉터(Web Service Director)'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내가 만들고 싶은 새로운 서비스가 있는가? 그 서비스를 어떻게 만들 것이며 얼마의 비용이 필요하며 얼마의 기간이 소요되며 어떤 사람이 있어야 하며 어떻게 성장할 것이며 누구를 만나야 첫 시작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부터 웹 서비스 디렉터의 길을 걸어야 한다. 웹 서비스 디렉터는 자신이 회사이며 자신이 자본이고 자신이 원동력인 1인 기업이다. 영화로 치자면 감독이다. 감독 중에도 독립 영화 감독 쯤 될 것이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웹 기획자라는 애매하고 이런 저런 일에 언제든 얽힐 수 있는 일을 하든 웹 콘텐츠 기획자가 되든 웹 서비스 기획자가 되든 웹 서비스 디렉터가 되든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의 몫이다. 그러나 선택 뒤의 결과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떤 선택이든 결과는 제각각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좀 더 복잡한 일을 하려고 할수록 고통은 깊고 댓가는 값지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웹 서비스 디렉터'를 가장 추천하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라. 가장 힘들고 어렵고 추천하기 힘든 일을 가장 끝에 이야기하는 게 인지상정 아닐까? 세상 어디에도 쉽고 빠르게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래 전에 경보 경주를 본 적 있는데 멀쩡한 사람이 그 경주에 끼어들었는데 상위 등수에 들지 못했다. 신체 장애자들은 목숨을 걸고뛰었고 그 사람은 그냥 열심히 뛰었다. 토끼와 거북이의 이솝 우화와 같은 이야기다. 세상 어디에도 한 번에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경우는 없다 .심지어 병신들과 함께 뛰는 경주에서 자칭 정상인이라는 자가 일등을 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한 쪽 다리 뿐인 사람들을 우습게 보았고 심지어 그들과 뛰며 농담도 했다. 문제는 그 경주의 길이가 12km였다는 것이다. 그는 5km부터 뒤지기 시작했고 장애인들은 느리지만 꾸준한 레이스를 펼쳤다. 그는 결국 8km 지점에서 기권을 했다. 경기에 참여한 장애인들은 모두 결승선에 도달했다. 가장 마지막에 도달한 장애인은 11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