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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말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는 똥이다

나는 지금 제안서를 하나 쓰고 있다. 몇일을 고민해서 여러 페이지의 텍스트 파일을 만들었고 그것을 파워포인트 파일로 옮기고 있다. 과거의 제안서에도 그랬지만 이번 제안서에도 "아이디어"가 들어가 있다. 그 회사가 우리 회사와 계약이 될지 그렇지 않을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항상 제안서에 "아이디어"를 넣는다. 그것도 바로 실행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적는다.





아이디어가 재산인데 그걸 그냥 알려줘?

지금 함께 일하는 분은 내가 제안서에 아이디어를 상세히 적는다고 했을 때 매우 걱정했다. 그 분은 내 아이디어가 매우 참신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진 가장 큰 재산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 아이디어가 언제나 참신한 것은 아니고 그 분이 내게 갖는 기대 때문에 과찬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 분은 지식 노동을 하는 웹 서비스 기획 컨설턴트 - 바로 나 - 가 계약도 하기 전에 아이디어를 다 이야기하는 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래도 나는 제안서에 아이디어를 상세히 기술하곤 했다. 지금 쓰고 있는 제안서에도 새로운 웹 서비스를 위한 아이디어를 몇 개 상세히 적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지금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안서에 적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첫번째 이유는 아주 보편적인 관점인데 '내가 생각하는 건 다른 사람도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는 천재도 아니고 독특한 세계관을 갖고 있지도 않고 예술적 창조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단지 나는 웹 서비스 기획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고민하고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더 노력할 뿐이다.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것은 세상 누군가 반드시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별로 특별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생각하고 고민하고 노력한다면 누구든 나와 같은 아이디어를 발견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아이디어라는 것은 너무나 독창적이어야한다는 의견에 반대한다. 그래서 지금 떠오른 아이디어를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우습다고 생각한다.

두번째 이유는 직업적인 관점에서 더 자유롭기 위해서다. 웹 서비스 기획을 하는 컨설턴트라는 '직업'은 세상의 모든 일 중 가장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이다. 장한나가 지휘하는 걸 보며 감동을 느꼈을 때 '이 감동을 웹 서비스를 통해 그대로 전달하려면?'이라고 고민한다. 무릎팍 도사를 보며 '멘토링 시스템은 너무 무거운 느낌이라 거부감이 드는 게 아닐까? 사실 사람들은 고민의 해결 보다는 그냥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데 더 관심이 있지 않을가? 이런 걸 구현하는 커뮤니티는 무엇일까?'라고 고민한다. 지하철에서 무가지를 무심히 보고 있는 사람들과 그걸 지하철 선반에 올려두면 1분 쯤 있다 가져 와서 읽는 또 다른 사람을 보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소유했던 콘텐츠를 자신이 읽는 것에 대해 새로운 감정을 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콘텐츠 유통 시스템에 첫 소유자의 흔적을 끝까지 남기는 게 좋은 것인지 아닌지 고민한다. 이런 잡다한 고민을 해야 하는 웹 서비스 기획 컨설턴트에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머릿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고통이다. 블로그에 적어서 공개하거나 제안서에 적어 버림으로써 그 아이디어를 버리게 되고 비로소 새로운 아이디어가 들어 올 영역을 확보한다. 아이디어가 계속 나오려면 잘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아니면 온통 쓸모없는 물건으로 가득찬 방을 지키는 늙은 개처럼 살 수 밖에 없다.

세번째 이유는 단지 아이디어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조그만 커뮤니티에서 시작하여 큰 커뮤니티로 발전한 어떤 회사의 미래에 대한 제안서를 쓰고 있다. 큰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새로운 회사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는 고객에게 성공적으로 새로운 웹 사이트를 만드는 방법을 이야기했고 그 핵심 과제로 기존 커뮤니티의 사용자가 자연스럽게 새로운 웹 사이트로 이전하는 방법, 아이디어를 이야기했다. 제안서만 본다면 그대로 따르면 성공할 것 같다. 여기서 성공이란 기존 커뮤니티 사용자들의 이탈을 막으며 이들이 기존 커뮤니티를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웹 사이트로 옮겨 가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제안서에 상세히 썼다. 그런데 뭐? 직접 일을 해 보면 알겠지만 내가 아무리 상세히 아이디어를 기술하더라도 실제 일하는 과정에서 수 없이 많은 '변수'가 발생한다. 그 '변수'는 아이디어에서 결코 설명할 수 없고 해결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말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는 똥이다

나는 이 격언을 아홉살 때 깨달았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랬다! 여덟살 때 집에서 혼자 놀 때 십자 드라이버로 온갖 제품을 뜯어 내곤 했었다. 특히 카세트 라디오를 몇 번이나 뜯어 내곤 했다. 라디오를 뜯으려면 깊은 구멍 속에 있는 나사못을 빼 내야 했는데 매 번 십자 드라이버로 돌려 빼는 것은 가능했지만 라디오를 들어서 나사못을 흔들어 떨어 뜨려야 했다. 몇 번 그런 짓을 반복하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었다. 자석을 쇠에 마구 문지르면 쇠가 자성을 띄게 된다는 것. 이건 아버지가 사 주었던 과학 책에서 읽었던 것이다. 집에 있던 자석을 꺼내 십자 드라이버에 마구 문질렀더니 아싸~ 나사못을 다 돌린 후 조심스럽게 십자 드라이버를 꺼내자 그 끝에 나사못이 달려 있는 게 아닌가. 그 날 저녁 어머니께 이 놀라운(!) 발견을 자랑했더니 곧장 빗자루가 날아 왔다. 왜 멀쩡한 카세트 라디오를 해체했냐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신문을 읽다 미국에서 십자 드라이브 끝을 자석으로 만든 사람이 수십억원을 벌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 때 깨달았다. 말하지 않은 아이디어는 똥이라는 것을.

이 이야기는 가끔 술자리에서 하곤 했는데 한 10년 전에 이 이야기를 했을 때 누군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런 말을 했다, "어! 나도 그랬어요,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데!!!" 나는 그 때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 수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아이디어는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 또 생각하고 있다. 그 때 비로소 아이디어라는 것이 근본적인 자산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언제든 누구에게나 이야기해야 한다. 그걸 지키고 싶다면 바로 특허 등록을 하든가 사업을 추진하면 될 일이다. 아이디어는 와인이 아니다. 그냥 구석에 처 박아두고 마음 속에 남겨 둔다고 점점 더 가치가 높아지지 않는다. 물론 어떤 아이디어는 숙성 과정을 통해 더욱 훌륭한 아이디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아이디어가 숙성 시킨다고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와인도 바로 먹어야 하는 경우가 있고 숙성을 시켰을 때 맛이 더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아이디어는 그 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경우도 있다. 어떤 아이디어는 너무 덜 익어서 좀 숙성을 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되었든 내 속에만 존재하는 아이디어는 그냥 똥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제안서에 아이디어를 남발한다. 물론 내 아이디어가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고 어떤 것은 매우 위험하거나 고객사의 요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공개하는 것이다. 아이디어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고 고객사가 내 아이디어를 좋아한다면 그 때부터 다시 아이디어를 검토하면 되니까.

내가 제안서에 아이디어를 적는 이유가 또 하나 더 있다. 고객사가 원하는 웹 서비스만 만들어주는 일을 하고 싶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이 원하는 서비스에 대한 아이디어만 내면 될 일이다. 나는 고객사와 만난 후 그들이 원하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오랫동안 생각한다. 그 결과 내 가슴에서 하고 싶은 일이 샘솟으면 - 그러면 아이디어도 마구 나온다 - 비로소 제안서를 쓸 수 있다. 만약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으면 "그 프로젝트는 할 수 없다"고 통보한다. 아이디어도 없는데 어떻게 고객사의 웹 서비스를 기획할 수 있겠나?

결국 내가 짧은 시간 동안 그 고객사가 요구하는 것에 몰입하고 또한 사랑하게 되었을 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온다. 그 아이디어는 어차피 내 것이 아니라 고객사의 것이다. 그러니 비록 계약이 되지 않았더라도 고객사는 그 아이디어를 가져가도 된다. 계약이 되지 않아도 나 또한 고객사 덕분에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되었고 흔히 경험하기 힘든 사랑의 감정과 흥분을 느낄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내 머릿속에서 떠 오른 아이디어를 공개해도 관계 없다. 금전적 이익보다 더 훌륭한 감정적 경험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아이디어는 자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는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나오는 단순한 부산물일 뿐이다. 그러니 아이디어는 보안을 유지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냥 이야기하고 서로 나누면 좋은 게 아이디어다. 내 말을 믿지 못해도 관계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 그런 자세 -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함부로 내 뱉는 행위를 해 보라. 자신에 대한 겸손함을 얻게 될 것이고, 세상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에 대한 공감을 얻게 될 것이다.

엉뚱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오픈 소스 프로젝트나 위키 프로젝트를 좋아한다. 또한 웹을 좋아한다. 웹(WWW)은 콘텐츠를 쉽게 공유하기 위해 기획 되었다. 그러니 웹에서 무슨 짓을 하든 - 블로깅을 하든 위키 피디어에 글을 쓰든,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리든 - 무언가를 지키려 한다면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왜냐면 웹은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 아니라 '그냥 가져 가세요'라는 관점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웹에서 아이디어를 공개하는 사람들은 존경받고 지키려는 사람들은 힘든 법이다. 내가 웹이나 오픈 소스 프로젝트나 위키 프로젝트를 좋아하는 것은 그냥 '공개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는 똥이다'라고 말하는 내 성격과 맞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런 성격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웹은 또한 걸맞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