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emo

진도개와 기획자

늦은 저녁 피곤한 마음으로 돌아와서 TV를 켜니 진도개에 대한 프로그램이 하고 있다. 멍하게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마음이 동하여 눈물이 나려 했다. 프로그램을 보며 가슴을 울렸던 몇 구절을 정리해 본다.

- 공식적으로 진도개는 황구와 백구만 인정한다
- 황구와 백구만 교배를 하면 눈이 흐려진다
- 진도개의 특징은 말린 꼬리였는데 이젠 솟은 꼬리를 좋아하여 꼬리뼈를 부러뜨리기도 한다
- 성질과 형질이 바뀌고 있다, 고양이가 쥐를 못 잡는 꼴이 되고 있다
- 진도개는 다른 개와는 달리 자기의 성격을 갖고 있다
- 세계적인 배포를 위해 진도개의 사회성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황구, 백구, 흑구, 네눈박이, 재구, 호구... 진도개의 종류는 여섯 가지 종류나 된다고 한다. 진도개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며 문득 이 놈들과 우리 처지도 비슷한 게 아닌가 싶었다. 웹 서비스 기획 컨설턴트로써 살기로 하며 과거의 사이비 컨설턴트와 다르게 일을 하기로 작정을 했다. 그리고 일년이 흘렀다.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진도개의 삶과 비슷한 위기감 혹은 진도개에게 인간과 같은 감정이 있다면 느꼈을 감정을 느꼈다.


많은 종류의 웹 서비스 기획자가 있다. 어떤 기획자는 커뮤니티에 강하고 어떤 기획자는 비즈니스 모델링에 강하고 어떤 기획자는 개발 기획에 강하다. 그러나 업계는 단 두 종류의 기획자를 기획자라고 정의한다. 일 잘하는 기획자와 그렇지 않은 기획자. 그리고 인간성 좋은 기획자와 천재적 능력의 기획자만 기획자로 인정한다. 진도개가 최소 6종류 이상이 있지만 정부는 그 중 황구와 백구만 진도개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그로 인해 진도개는 그 고유한 특성 중 하나인 맑은 눈빛 대신 흐릿한 눈빛을 갖게 된다. 인간성 좋은 기획자와 천재적 능력의 기획자만 원하는 업계의 풍토는 흐릿한 눈빛의 기획자만 양산되는 현실에 처하게 될 것이다. 주변을 돌아 보라. 기획자로서 타고 난 품성의 기획자를 본 적 언제던가. 전투적 자세로 사물을 관찰하고 기획의 산출물을 자신의 삶에 투영하고 강력한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 늦은 밤을 새벽으로 이으며 기획의 칼날을 벼리는 그런 타고 난 기획자를 본 적 언제던가. 불필요하게 개발자와 대립하고 경영자에게 아양 떨고 술 자리에서만 말 많은 잡종 기획자는 또 얼마나 흔하고 흔한가.

말린 꼬리 대신 꼿꼿한 꼬리를 좋아하는 유행 때문에 타고 난 기획자의 꼬리가 부러지는 일은 지난 10년 간 끊임없이 목격했다. 풀숲을 헤치며 사냥에 적합하게 적응한 말린 꼬리가 보기에 좋으라고 펴지면서 진도개는 유행을 타 잘 팔린다. 기획자도 마찬가지다. 타고 난 기획자의 본성이 유행에 따라 이런 저런 모양으로 교정되고 교화되어 기획자 자신의 품성을 잃게 된다. 그런 기획자가 내 놓은 기획이란 유행을 따르는 것이며 도전적이기 보다는 타협적이며 전투적이기 보다는 순종한다. 말린 꼬리가 하나의 완벽한 기획을 위한 기획자의 전투적 기획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품성이라면 유행에 따라 펴진 꼿꼿한 꼬리는 완벽한 기획보다 경영자가 이해할 수 있는 기획을 해야 하는 현실 적응이다. 본성을 상징하는 말린 꼬리를 거세 당한 꼿꼿한 꼬리의 진도개도 진도개는 맞다. 전투적 기획보다 경영자의 입맛에 맞는 기획을 해야 하는 기획자도 기획자는 맞다. 그래도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 꼬리를 누가 부러뜨렸는가?'

진도개가 해외에 알려질 때 자기 개성이 너무 강하고 다소 호전적이라는 설명이 붙는다며 진도개 보호 관계자들이 우려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진도개의 사회성이 좀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되면 진도개다운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우려했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상품으로써 진도개의 품성은 개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진도개의 본성적 특성을 살릴 필요도 있을 것이다. 정답은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진도개는 상품이기 때문에 패션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성이 강화된 진도개를 키울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진도개의 고유한 성격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 둘이 공존할 때 진도개는 정말 진도개 다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웹 서비스 기획자는 직업이고 직종이다. 이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직업적 성격 뿐만 아니라 개인적 특성과 삶의 편력, 경험과 철학을 갖고 있다. 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 복잡한 존재, 인간이다. 때문에 단지 기획자의 본성이 어떠하고 이 업계가 원하는 기획자의 모습이 문제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직업적 특성과 생활 그리고 철학이 일치할 때 가장 훌륭한 웹 서비스를 기획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웹 서비스 기획자가 선진적이며 혁신적이며 높은 수익을 발생시키는 서비스를 만든다고 믿는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웹 서비스 기획자 순종론일 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나는 가끔 이런 내 믿음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그런 위기감조차 내가 하고 있는 일, 내 직업이 다이나믹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위기감을 느낀다는 것은 끊임없이 이 직업의 정체성에 대해 세상이 의문을 표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도개는 스스로 존재를 규정할 수 없었다. 인간에 의해 존재가 정의되고 자본의 논리에 의해 거세되어 왔다. 진도개의 운명과 웹 서비스 기획자의 운명은 일견 비슷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정말 다르고 다른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웹 서비스 기획자로서 상품성과 사회성, 직업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하나의 존재, 인간이다. 하나의 회사, 하나의 직업, 하나의 세대에서 우리는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빼앗길 수 없는 유일한 가치를 지킬 수 있다.

의지

나는 하나의 회사에서 웹 서비스 기획자로서 실패했다, 여러 번이라도 관계 없다.
나는 하나의 직업에 적응하는데 실패했다, 여러 번이라도 관계 없다.
나는 지난 20년 간 종사했던 직업에서 실패했다, 일흔이라도 관계 없다.

중요한 건 의지다. 내 의지를 이마에 붙이고 다니며 광고할 수 없다. 의지를 말로 떠들고 다닐 수 있을 지 몰라도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는 중요하다. 의지는 생활에서 증명된다. 웹 서비스 기획자로서 나의 의지는 무엇인가? 이것이 핵심적인 질문이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혹은 생활에서 24시간 그 질문을 잊지 않고 살고 있다면 우리에겐 이미 웹 서비스 기획자로서 의지가 있다. 그 의지는 누구에게 빼앗기는 것도 누구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도 누군가와 타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게 진도개와 웹 서비스 기획자가 비슷하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차이점이다.


나는 요즘 '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책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한다. 내가 걷는 길이 소위 IT 컨설턴트라고 불리는 혹은 스스로 규정하는 많은 사람들과 같은 길일까 하루에도 몇 번씩 반문한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한다. 그리고 책임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일이 실패할 수도 있다. 계속 실패할 수도 있고 어쩌면 나는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지 모른다. 그러나 책임질 수 있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기획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면 후회는 없다고 믿는다.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어떤 사람은 내 실패를 교훈 삼아 바른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성공적으로 기획을 하고 그 방법론과 예제를 제시할 수 있다면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더욱 빠르게 혁신과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블로그에 컨설팅이라는 태그를 붙이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의 홍보가 아니라 그런 일상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다. 물론 내가 가는 길이 옳기를 바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남긴 흔적을 지표 삼아 더 곧고 바르고 창대한 길을 발견할 수 있기를 원한다.

바라건데 진도개의 본성을 배울 수 있기를... 그러나 결코 개처럼 살지 않기를.

'Memo'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띠앙  (0) 2006.12.06
조선닷컴 개편과 관련하여  (5) 2006.12.06
Visualization  (0) 2006.12.05
inspiration  (0) 2006.12.04
홍보와 스팸  (0) 2006.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