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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창조성과 프로세스

사람들은 창조력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추동할 어떤 방법을 떠올린다. 만약 창조력이 발생하는 어떤 공식이 존재한다면 창조력을 만들어 내는 방법, 즉 프로세스(process)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들은 그런 생각은 마치 coding automation tool을 만들었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음을 금세 깨달을 것이다.



나는 인간의 창조력에 대해 그것을 신이 부여한 매우 고유한 것이며 때문에 창조력이 발생하는 것은 관찰할 수도 검증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 우리는 어떤 정신적 경로를 통해 창조력이 발휘되며 그런 창조력을 통해 위대한 미술 작품이나 오랫동안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문학 작품이나 획기적이며 인기있는 디자인이 나오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할 뿐이다. 나는 그런 현재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때문에 만약 누군가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발견했고 이것을 따라한다면 당신도 창조적인 산출물을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분명히 '사기꾼'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이 주장하길 인간의 창조적 능력은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안정된 상태에서 발현된다고 했다. 그러나 고흐는 미치기 일보 직전 혹은 미친 후에야 후세에 남을 작품을 그렸다. 물론 네오나르도다빈치나 피카소와 같이 나름대로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안정된 상태에서 걸작은 남긴 사람도 있다. 실화에 기초한 영화인 <빠삐용>에서 주인공은 어떤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오직 탈출하고자하는 욕구를 실천하고 그 과정에서 각종 탈출을 위한 창조성을 발휘한다. 다시 말해 창조성이 반드시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안정된 상태에서 발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창조성은 주변 환경보다는 그 사람의 의지에 더욱 큰 영향을 받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 또한 증명된 것만큼 반증의 요소가 많다.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창조성"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상황적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창조적인 것이 또 다른 사람에겐 범죄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겐 평범한 것이 또 다른 사람에겐 획기적인 창조력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떤 사회 문화에서는 천시되는 것이 또 다른 사회 문화에서는 창조력이 될 수도 있다. 1960년대 백남준의 행위 예술을 당시 한국 사회라면 분명 미치광이 취급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창조성" 혹은 "창의적인 활동"은 임의적인 정의를 전제하는데 매우 많은 사람들이 창조성조차 프로세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런 창조성을 만들어낸다는 프로세스를 정의하는 사람도 있고 그걸 따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창조성은 프로세스로 정의하기 힘든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 최소한 현재는 그렇다. 어느 시점에서 어떤 사람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원하는 창조성이 발현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창조성이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며 그것이 반드시 발현될 것이라는 믿음만 있을 뿐이다.

또 한 가지 창조성에 대해 분명한 사실이 있다. 창조성은 마치 비누방울과 같아서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을 만지려고 들면 터져 버린다. 창조성을 특별한 프로세스 안에 집어 넣는 순간 남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연구 자료와 리서치 결과물 뿐이다. 정작 그 많은 자료 속에서 창조성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전히 창조성을 구현하는 프로세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조언을 하고 싶다,
 
"창조성의 비누방울이 생산되기 시작할 때 누군가 그것을 그림으로 옮기거나 묘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비록 비누방울은 사라지겠지만 그것을 묘사한 결과물은 남을 것이다. 그 결과물을 통해 창조성의 모습을 아직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흐릿하게나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창조성을 위한 프로세스가 필요하다면 그런 정도의 수준에서 멈춰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