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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기획에서 반복과 창조

기획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 중 하나가 "창조적인 일은 반복적이지 않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기획자는 반복적인 일이 아니라 창조적 일을 해야 한다는 근거없는 자기 확신이 있다.



여러 번 이야기했듯 기획은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행위가 아니다. 어떤 사건의 본질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관찰하는 것이 예술가의 태도와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기획의 결과물로써 예술 작품을 기대하는 경우는 없다. <창조적 웹 기획과 일반적인 웹 기획>에서 이야기했듯 기획은 창조가 아니다. 그런데 기획에서 창조적인 경우와 일반적인 경우가 있다는 걸 이해한 후에도 여전히 빠져 나오기 힘든 자기 확신이 있다. 바로 기획은 반복적인 일이기 보다는 새롭고 비반복적인 일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정말 그럴까?

이 질문 혹은 자기 확신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기획 중 80%는 반복적인 일이며 20%만 새로운 일이다"


80%의 반복되는 일

예를 들어 새로운 웹 사이트를 초기부터 기획해야 한다면 눈을 감고도 훤히 떠오르는 일정표가 있다. 비전 수립과 전략 수립을 위해 시장 조사를 해야 하고, 내부 인원의 의견을 청취해야 하고, 그 의견에 대한 종합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고, 핵심 사용자를 선별하여 인터뷰를 해야 하며, 그들이 원하는 콘텐츠와 서비스가 무엇인지 도출해야 하고... 그 외 수십가지가 넘는 프로세스가 줄줄이 떠오른다. 이런 과정은 기획에서 80%의 반복적인 일에 속한다.

80%의 반복적인 일 또한 혁신하려는 관점에서 추진해야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런 프로세스들은 혁신보다는 성실함과 일정 준수가 요구된다. 빨리 하면 할수록 자원의 낭비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이 80%의 과정을 자주 많이 훌륭하게 반복한 기획자는 그렇지 않은 기획자에 비해 보다 짧은 시간에 현황을 파악하여 자신이 만들어 나가야 하는 어떤 것 - 웹 서비스 기획자라면 웹 서비스의 구체적인 모습 - 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이런 능력을 통찰력(insight)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20%의 새로운 일

만약 80%의 반복되는 일을 통해 현재 진행하고자 하는 어떤 일에 대해 구체적인 감(feel)을 잡았다면 이제 20%의 새로운 일을 해야 할 시점이다. 20%는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 "저 웹 사이트는 정말 혁신적이군!"
- "어떻게 저런 걸 생각할 수 있었지?"
- "와우! 멋진데!"

iPod이나 Macbook Air를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의 일은 반복되지 않거나 반복되기 매우 힘든 영역에 속한다. 기획자에게 필요한 창조성은 바로 이곳에서 발휘된다. 시장 조사를 하거나 FGI를 하거나 사업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창조성은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어도 된다. 그러나 그런 반복되는 과정이 끝난 후 핵심이 되는 어떤 콘텐츠, 서비스,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프로세스가 시작되면 기획자에게 필요한 것은 강력한 창조성이다.


반복과 창조의 관계

그 무엇에 대해 기획하는 사람이든 간에 스스로 기획자라고 명함에 쓰고 다니거나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인지하고 있다면 반복과 창조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결심해야 한다. 반복 없는 창조는 없다. 반복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성실함이고 그 이후에 창조하는 과정이 시작된다. 반복되는 과정에 익숙해져야 창조하는 과정을 위한 시간을 벌 수 있다. 지금도 주변의 많은 기획자들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려고 한다. 혹은 반복되는 과정을 지겨워하며 곧장 창조적 과정으로 넘어가려 한다.

세상 모든 일에는 근본이 있고 결과가 있다. 근본을 잘못 잡으면 결과가 좋을 리 없다. 기획자에게 근본이란 80%의 늘 반복되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의미한다. 그 반복되는 일이 근본이 되고 근본을 제대로 수행했을 때 비로소 20%의 창조적 업무를 수행할 준비를 마치게 된다. 근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발휘한 창조성이란 결국 사용자로부터, 고객으로부터, 내가 속한 조직으로부터 외면 받는 서비스를 만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