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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uacu ONLY

저는 오늘 투표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제 17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저는 오늘 투표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 글은 저를 비롯한 '적극적으로'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을 위한 글입니다.


저는 올해까지 제게 투표권이 주어졌던 투표에 거의 모두 참여했습니다. 30여년 전 반강제였던 초등학교 반장 선거부터 시작해 지자체 의원 선거,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에 모두 투표했습니다. 어떤 경우엔 정말 누구도 뽑을 사람이 없었지만 책임감 때문에 투표한 적도 있었고 또 어떤 경우엔 투표하고 싶지 않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하여 투표한 적도 있습니다. 학교에 다니며 참정권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근간이라 배웠습니다. 선거에서 투표, 즉 자신이 지지하는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는 행위는 비록 그 사람이 당선되지 못하더라도 민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투표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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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는 오늘 투표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몇 개월 전부터 고민을 반복했고 그 결론으로 오늘 투표를 하지 않기로 했고 또한 이렇게 공개적으로 투표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오늘 투표하지 않습니다. 제가 투표하지 않는 이유는 거창합니다. 그러나 몇 개월간 고민한 이유이며 또한 죄책감을 느낍니다. 바로 이 '죄책감'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오늘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내가 투표하지 않는 이유

첫째, 저는 강요된 투표가 싫습니다.

누군가를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방법으로써 투표는 아닙니다. 투표에서 '기권'이라는 선택도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제가 투표하지 않는 것은 이번 선거에서 내가 지지할 사람이 없다는 '기권'의 의사입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대통령 선거에서 '기권'이라는 항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우리나라는 UN에서 최근에도 북한 핵사찰이나 북한 인권 관련 투표에서 기권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도 자신의 이해 관계에 의해 적극적인 찬성과 반대의 투표를 하지 않고 '기권'을 하곤 합니다.

저는 이번 선거에서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이 제 의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에서 기권을 표시할 방법은 없습니다. 투표장을 방문하여 선거인 명부에 서명하고 투표 용지에 "기권"이라고 쓰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무효표로 처리될 것입니다. 만약 기권이라는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투표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철회하고 투표소로 가서 투표할 것입니다. 투표가 누군가를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과정일까요? 표를 던질 사람이나 대상(정당)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거나... 이런 투표 구조에서 '기권'을 선택한 사람들의 의사는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습니다. 그저 오늘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일 뿐입니다. 제 의견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은 게 안타깝지만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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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선택하라는 주장을 거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선의 선택이 아니면 차선의 선택이라도 하라고 합니다. 차선도 없다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최악의 선택이 되지 않도록 당신이 투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논리로 설득하려는 사람입니다. 최선도 없고 차선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최악의 선택을 막기 위해 투표를 하라니요. 저는 최악의 선택이 **번 기호 후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당선되는 걸 막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논리를 펴는 분들을 보면 도대체 투표라는 것, 선거라는 것에 대해 무슨 관점을 갖고 있는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자신이 적이라고 생각하는 누군가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 외엔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최초의 투표는 1992년 국회의원 선거였고 그 다음은 그 해 12월 제 14대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저는 '민주정부수립'이라는 대의명분과 '비판적 지지'라는 당시 총학생회의 노선을 따라 민주당과 김대중씨를 지지했습니다. 제 의견은 좀 달랐지만 설령 최선이 아니더라도 최악을 선택하지 말아야한다는 소위 '대의'와 '명분'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15년 전 대통령 투표일 전날 밤, 김대중씨를 지지하는 대학생 중 한 명이었던 저는 부산의 한 지하철 역 앞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며 "민주정부를 만들기 위해 김대중씨에게 투표하라"는 전단물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 속으로 비록 대통령이 되지 못하겠지만 개혁 집단의 미래를 위해 백기완씨에게 투표를 해야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는 대의명분 때문에 김대중씨를 지지해야 한다는 당시 대학생 학생회(전대협)의 강령을 적극적으로 따르고 있었습니다.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을 때 한 중년의 아저씨가 제 앞을 지나며 바닥에 침을 뱉으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미친 노무 새끼, 니는 니 부모가 이러는 거 아나? 부산 살믄서 김영삼 안 찍고 대중이 찍자고? 여서 맞아 죽지 않을라믄 조심해라, 알았나?"

그 이야기를 듣고 지하철 화장실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 비판적 지지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던 스물 한 살의 어린 아이에겐 너무나 자존심 상하는 욕이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내가 선택하여 김대중씨를 지지하고 있었다면 그런 욕에 대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소위 '대의를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몇 개월을 견디며 선거운동을 했는데 선거 운동 마지막 날 그런 욕을 들으니 눈물이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이후로 여전히 어떤 대의와 명분을 위해 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최선이 아니지만 차선을 위해 투표를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런 선택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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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이젠 이 놈의 투표 압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습니다.


민주주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의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반드시 투표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답하는 것은 "그렇다"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 선거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에서 선거가 '꿩 대신 알'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지구의 창조자가 외계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고 싶은데 그런 사람이 후보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비슷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후보들에게 "당신은 외계인의 존재를 믿습니까?"라고 질문한 다음에 투표할 사람을 뽑아야 할까요?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없다면 투표하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민의 즉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 구조를 말합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민주주의의 핵심이 선거와 투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걸 인정하더라도 투표가 강제되는 사회는 또 다른 압제가 아닐까요? 투표할 사람이 없다면 투표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오늘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투표 안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사회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고 심지어 대한민국의 미래에 관심없는 사람처럼 매도하는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민주주의와 선거 그리고 투표라는 행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를 바랍니다.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목숨 걸고 지키고 싶더라도, 선거라는 절차와 그 과정을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지지하더라도 투표할 사람이 없으면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투표는 누군가에 대한 지지를 표하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왜 민주주의와 직결되어야 하나요?

내가 대한민국을 욕한다고 대한민국을 사랑하지 않나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방법이 투표 외에는 없나요? 평소에 기부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 투표만 하면,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면 제 할 바 다한 것인가요? 정말 진지하게 묻습니다. 투표가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모든 것인가요?



죄송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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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통령 선거는 역대 최저 투표율일 것 같다고 합니다. 아마 저도 이것에 일조할 것입니다.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아마 아직도 저는 제가 스스로 이야기한 "왜 나는 투표하지 않는가?"에 대해 정당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후보가 있든 없든,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있든 없든, 내가 투표를 하고 싶든 말든 일단 투표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으니까요. 아니, 그런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투표일과 겹쳐서 여행가는 사람들이나 놀러 가는 사람들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여전히 왜 "기권할 수 있는 자유는 주지 않는가?"에 대해 저처럼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바보 멍청이, 정치에 대한 기본 개념도 없는 인간,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으로써 책임감도 없는 사람, 최악의 사태를 막으려는 의지도 없는 사람으로 매도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오늘 저는 이런 주장을 합니다,

"투표하지 않을 자유권이 내게는 있다, 당신이 뭐라든 간에"

오늘 저는 최초로 투표하지 않습니다. 매우 불편한 마음이지만 내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기 바랍니다. 정치 좀 똑바로 해서 투표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투표하라고 강요하기 전에.


그러나 투표를 계속 할 것입니다.

오늘 대통령 선거에 투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많은 투표에 참여할 겁니다. 2008년도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도 투표할 것이며, 지자체 선거에도 투표할 것이고, 통반장 선거에도 투표할 것이고, 오피스텔 관리 위원 선거에도 투표할 것이고, 회사 총무 위원 선거에도 투표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어떤 자리를 맡아 일을 해야 할 것 같으면 고민을 반복하여 투표 받을 사람으로 출마할 것입니다. 오늘 투표하지 않는다고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제 관점이 변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관심 가질 것이며 열심히 참여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이 조금씩 변한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늘은 투표하지 않습니다. '기권'이라는 적극적 의사 표현을 하기 때문입니다. 투표 용지에 '어쩌라고?'라고 적고 싶지만 대의 민주주의를 모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투표하지 않고 '기권'에 한 표 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