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emo

기획자와 생각의 속도

5배 빨리 읽고, 5배 더 외울 수 있다는 조그만 속독(fast reading) 광고를 보았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에 한 동안 유행했던 학습 웅변, 주산과 더불어 속독도 있었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MBC에서 변웅전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묘기대행진>라는 프로그램에서 독속을 배웠다는 아이 둘이 나와 두꺼운 아브라함 링컨의 전기를 십여초에 한 장씩 넘기며 읽은 후 그 내용을 물어보던 것도 기억난다. 어린 마음에 책을 빨리 읽는 게 무척 부러웠는데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속독을 배워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빨리 읽는다고 시험 점수 올라가나?"

10살도 안된 꼬마에게 어머니의 강력한 점수에 대한 압박은 모든 일의 결과가 월말 고사 점수에 얼마나 기여하느냐로 판단하던 시절이었다. 월말 고사에서 문제 하나 틀리면 한 대 맞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속독은 그리 좋은 기술은 아닌 것 같다. 특히 기획 관련 일을 하며 무언가를 빨리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연산 능력이라는 생각을 한다.


정보와 연산

인간의 뇌 구조는 아직 밝혀지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일반적 저장 매체와 많은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호응을 얻고 있다. 시청각으로 흡수하는 일반적인 정보는 대뇌 피질 부분에서 받아 들이지만 대부분의 정보는 오랫동안 기록되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웹 서버에 로그(log) 파일이 쌓이듯 인간이 일상의 모든 경험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속독은 문자를 시각을 통해 빨리 받아 들이는 기술이다. 마치 녹음된 이야기를 4배속으로 들으면 무슨 이야기인지 처음엔 알아 듣기 힘들지만 적응을 하면 내용을 알아 듣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한 쪽은 시각 훈련이고 한 쪽은 청각 훈련이다. 문제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정보가 입력된다고 해도 연산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면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어떤 기획이든 기획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필요한 기술은 빠른 정보 수집과 재분류, 그리고 재가공 능력이다. 그런데 현업에서 기획을 하는 사람들은 보면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의 연산이 끝나기도 전에 기획안을 도출하곤 한다. 연산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기획 산출물은 마치 다량의 정보를 읽었음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몇 년 전에 한 회사에서 추진하는 신규 웹 서비스의 초기 단계 컨설팅을 한 적 있다. 컨설팅이 시작되기 전 이미 작성된 웹 서비스에 대한 기획안을 받아서 검토했다. 거의 100여 쪽에 달하는 기획안은 산업계 전반에 대한 분석, 진입 시장에 대한 분석, 관련사에 대한 분석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00여 쪽의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매우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검토한 것 같았다. 그런데 문서를 읽던 중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기획자를 불러 이런 질문을 했다,

"시장 분석 부분에서 해외 사례를 검토하셨는데요, 저희가 볼 때 이 사례는 한국 시장에 영향을 거의 끼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사례를 언급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질문을 들은 기획자는 오히려 왜 그런 질문을 하냐며 자신들이 만들려는 웹 서비스가 매우 독특하기 때문에 국내에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고 때문에 해외의 유사한 사례를 검토하여 포함시킨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와 한참을 토론한 끝에 해당 내용을 삭제하기로 했는데 아직도 그의 불쾌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기껏 조사해서 자료 찾았더니 관련 없다고 데이터를 빼라니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그 정보는 신규 웹 서비스를 제작하고 운용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관계 없는 정보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는 정보였다. 마치 컴퓨터에서 어떤 연산을 시작할 때 관련 없는 데이터가 많으면 많을수록 불필요한 연산이 늘어나 시스템 과부하를 초래하는 것과 유사하다.

특히 연산의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은 경우 과도한 정보는 연산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다.





대량의 정보와 생각의 속도


기획자에게 있어서 대량의 정보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생각의 속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기획 단계의 특정 시점이 되면 더 이상 정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판단과 결단을 위한 통찰(insight)이 요구된다. 통찰의 시점에서 직관적 접근법이 사용될 때 그동안 축적된 많은 정보 중 핵심이 되는 사항만 따로 추려지며 새로운 차원의 연산이 시작된다. 연산의 결과는 어떤 판단이나 결단으로 이어지고 그 속에서 비전과 프로세스가 도출된다.

기계적 프로세스를 즐기는 사람들은 직관적 접근법을 사용한 통찰을 예언이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논리적 문장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결정에 이르기 위한 상세한 근거와 증거를 원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대개의 성공적 웹 서비스나 사업은 그 근거가 철저하거나 대량의 데이터를 통해 성패를 판단했기 때문에 수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깊은 숙고와 빠른 판단을 가능케 한 대량의 정보가 이미 있었고 누구보다 빠른 생각의 속도를 가진 사람들이 대개 성공적 웹 서비스나 사업의 주체인 경우가 많았다. 성공한 사람들 중 감(feeling)으로 시작했다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조차 그들이 그 사업이나 웹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역사적으로 분석해 보면 꽤 오랜 시간 동안 - 최소한 몇 년은 된다 - 그 주제에 대해 고민했고 경험하고 학습하며 다량의 정보를 습득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획자는 생각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고 남들보다 더 빠른 생각의 속도를 보유해야 하는 직종이다. 그들이 더 빠른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한 것이지, 많은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게 기획자의 본업은 아니다. 그런 일은 문서의 분류나 언어적 학습 혹은 특정 분야에 대해 잘 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기획은 그런 대량의 정보를 수집한 후 재분석하고 재배열하고 그 속에서 직관적 접근법을 통한 통찰을 발휘하는 기술이다. 현실적으로 그런 과정을 매우 빠르게 진행해야 한다. 때문에 기획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이다.

'Memo'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검색엔진 위스폰(wispon)  (1) 2007.11.15
수능이 끝난 후  (0) 2007.11.15
NHN 신입 공채, 면접의 진실  (5) 2007.11.14
2008년도 사업 계획을 위한 Agenda  (0) 2007.11.13
Jokela High School Massacre 11/7/2007  (0) 2007.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