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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거지같은 회의를 막는 방법


기획자에게 필요한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기본은 회의록을 작성하는 기술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의록은 여러 사람이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것을 말하고 그 기록이 회의록이다. 때문에 회의록은 회의에서 언급된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야 하고 회의 이후 참석자 혹은 그 회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회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작성해야 한다.

그런데 회의록 작성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회의록과 녹취록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왜 회의록을 작성하는 게 어려운 일인 지 알고 있을 것이다. 녹취록은 단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회의록은 이야기를 요약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작성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회의록 작성자가 딴 생각을 하고 있거나 발언자의 표현을 잘못 이해했다면 결과적으로 회의록은 발언자의 의도와 다르게 엉뚱하게 기록될 가능성이 높아 진다. 실제로 며칠 전 회의에서 이와 똑같은 일이 있었다. 발언자는 "데이터를 알려 달라"고 했는데 기록자는 "데이터 포맷을 정의한다"라고 이해했고 그렇게 회의록을 작성했다. 만약 내가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회의록의 내용을 신뢰하여 정작 필요한 일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지시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기업이나 조직에서 회의록을 다시 읽어 보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때문에 회의록 작성을 회의 참석자 중 말석에 위치한 사람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다. 가장 어린 사람이나 경험이 적은 부하 직원에게 회의록 작성을 맡기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열심히 회의해 놓고 나중에 회의록을 보니 회의 내용의 핵심이 빠져 있거나 엉뚱한 이야기가 기술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경험이 부족하거나 회의 주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 회의록을 맡기는 것은 그만큼 회의록 작성을 요식 행위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만약 회의록을 작성하기에 참여 인원이 너무 적거나 (3~4명 이하) 회의록을 작성할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면 일단 회의 내용을 녹음 한 후 회의 참석자 중 한 명을 정해 회의 후에 회의록을 정리하도록 하는 게 좋다.

최근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회의록을 작성하는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을 보았다. 회의록 작성의 대표적인 실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서로 다른 회의록 작성자로부터 발견되었다. 하나는 "내가 아는 것만 기록한다"는 것이었다. A씨는 2시간 이상의 회의를 해도 언제나 원고지 2장 분량의 회의록을 작성했다. 길고 긴 회의를 짧게 요약하는 것은 훌륭한 능력이다. 문제는 그 요약이 실제로 회의한 내용이 아니라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정리라는 점이다. A씨는 회의 주제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때문에 어떤 내용이 중요한 것인 지 어떤 내용은 단지 제안일 뿐인지 판단하지 못했다. 때문에 자신의 제한된 지식과 경험 수준에서 회의록을 작성했고 덕분에 회의 내용 중 매우 중요한 안건이 기록되지 않는 일이 빈번했다.

B씨의 경우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회의 참석자들이 한 이야기의 주제를 정확히 기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인터페이스를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음에도 회의록에는 "콘텐츠 기획이 필요"라고 적혀 있는 식이었다. B씨는 어떤 참석자가 길게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의 주제를 정리하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대부분 회의 참석자들은 짧게 이야기하기 보다는 길게 이야기하고 한 가지 주제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이야기한다. 기계처럼 하나의 주제에 대해 기승전결 구조로 완벽히 서술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회의록을 기록하는 사람은 어떤 참석자가 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정리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비록 30분 동안 이야기를 했더라도 그 다양한 예시 때문에 혼란스러워하지 말고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B씨는 정리라는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는데 그가 혼란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참석자에게 "정리하자면 이런 이런 내용입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회의록 작성자는 회의 중간에 참석자들의 의견이 잘 정리되고 있는 지 참석자 전원에게 고지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회의의 기술>은 대부분 학창 시절에 배운 것이다. 20대 초반에 나는 하루에 10여 개가 넘는 서로 다른 주제의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고 의제를 제시하거나 회의록을 작성하거나 토론의 주체가 되곤 했다. 미리 회의 내용과 참석자를 고지해야 하고, 충분히 학습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하는 회의는 잡담의 나열일 뿐이며, 제한된 시간 내에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면 즉시 회의를 중단해야 한다는 등 회의를 잘 하기 위한 기술은 모두 20대 초반에 배웠다. 당시에는 이것을 <회의의 기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대학생이 가져야 할 상식이자 토론의 기초라고 알았다. 선배, 동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회의를 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매우 난감했는데 마치 내가 상식이라고 생각한 것이 매우 특별한 기술인 듯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회의 잘하는 법>과 같은 책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회의에 대해 학습하지 못한 사람에게 이런 책은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이런 책은 마치 '숨 잘 쉬는 법'이라든가 '똑바로 걷는 법'을 알려 주는 것처럼 느껴 졌다.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을 굳이 배워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굉장히 많은 기획자들이 회의를 통해 커뮤니케이션하지 못하는 주요한 이유는 그 자신이 회의를 준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회의에 대한 기본 태도와 방법을 배우고 있던 20대 초반의 어떤 날이 기억난다. 그 날 오후에 회의가 있었는데 나는 회의 자료를 검토하지 못했고 주제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지도 못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참석자 전원에게 미리 사안을 검토하지 못했음을 알려 주고 이번 회의에서 나는 발언권이 없다고 스스로 이야기했다. 5시간 동안 진행된 회의에서 나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물론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주제나 사안도 있었지만 미리 주제에 대해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당시 나와 내 주변의 분위기는 그런 것이었다. 준비되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와서 즉흥적으로 떠들어대는 참석자가 있는 회의는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마추어 시절에도 그런 일 - 준비하지 않고 회의에 참석하여 발언권을 얻는 사람을 경멸했는데 소위 프로라고 말할 수 있는 회사와 관련된 회의에도 이런 사람들을 자주 발견한다. 배포한 자료를 읽지 않고 와서 그 자리에서 생각한 이야기를 꺼내 놓는 사람들.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람들 자신 보다는 회의를 주최하는 사람(기획자)이 아닌가 한다. 메일로 회의 주제 하나 던져 놓거나 관련 자료 몇 개 보내 놓고 당연히 학습하고 오기를 바라는 회의 주최자들이 많다. 그렇다고 읽지 않은 사람들을 회의에 참석시키지 않겠다고 공언할 객기도 없으면서 남을 탓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회의 자체 보다는 회의를 준비하고 자료를 배포하고 그 내용을 사전 인지시키는 작업이 훨씬 중요하다. 그래야 아무도 준비하지 않고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 '난상토론'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회의를 근절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