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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e Story

개발자가 폐쇄적 공간을 좋아하는 이유

게임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회사에서 컨설팅을 하며 임직원이 급격히 늘어나 사무실을 정비할 일이 있었다. 인테리어를 화려하게 할 형편이 아니었고 프로젝트가 급하게 진행되는 중이라 새로운 게임 개발팀을 위해 파티션으로 구획 나누기를 하기로 했다. 마치 직사각형의 공간에 블록 놀이를 하는 것처럼 파티션을 나눠야 했는데 팀장들을 모아서 할당된 공간을 알려 주고 파티션을 그려오면 설치해 주겠다고 했다.

일주일 후 다섯 개 팀이 갖고 온 파티션 배치도를 받았는데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형태였다. 모든 팀들은 마치 성처럼 팀을 빙 둘러싼 180 cm의 파티션을 원하고 있었다. 팀 파티션 내부도 각 팀원들의 공간을 150 cm 정도의 파티션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앉았을 때 얼굴이 보이지 않을 높이의 외곽 파티션과 책상 위의 작은 파티션 정도였다. 예산이 상당히 초과하는 상황이었지만 왜 그런 요구를 하는 지 알고 있기 때문에 보스를 설득해서 각 팀이 원하는 대로 파티션을 설치해 주었다. 설치를 하고 나니 다섯 구역의 파티션 성이었다.

파티션 설치가 끝난 후 보스가 한 바퀴 다 돌아 본 후 불만을 토로했다, "이래서야 무슨 팀 간 협업을 할 수 있나? 복도를 지나다녀도 사람들 얼굴도 보이지 않아." 그 이야기를 개발 팀에게 전해 주자 그들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폐쇄적 공간이 주는 장점

최근 개발을 주업으로 하는 여러 회사를 다녀 보면 열린 공간에서 업무를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런데 개발자를 개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런 열린 공간이 주는 부담감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그들 대부분은 은둔형 외토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꺼리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개발자들은 개인적인 수준에서 독립적이며 폐쇄적 공간을 원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집중에 필요한 시간" 때문이 아닌가 한다.

광의적 개념에서 프로그래밍은 상당 부분 창조적 두뇌 활동을 요구한다. 단순히 어떤 코드를 반복해서 타이핑하고 앞뒤가 맞는 지, 스펙을 지키고 있는 지, 무결성에 대해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수준 높은 프로그래밍을 해야 하는 경우 단숨에 그 작업으로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곰곰히 생각하고 머릿 속에서 그것을 재조합하고 해체하고 다시 배열하는 작업은 고도의 지적 노동다. 그런데 그 상태 즉 창조적 두뇌 활동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집중을 위한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

이 준비 작업에 들어가는 유형은 다양한데, 어떤 사람은 음악을 듣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열 몇 잔의 커피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멍하게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일에 집중하기 위한 전 과정이라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 이야기를 걸거나 전화가 오거나 회의 자료를 독촉한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책을 읽다 북마킹을 하고 다시 그 지점부터 읽을 수 있는 것과 전혀 다르다. 집중 과정에서 방해를 받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폐쇄적 공간은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를 최소화시켜 준다는 측면에서 개발자에게 필요하다. 높은 파티션은 실제로 폐쇄적 공간을 제공하지 못한다. 파티션이 아무리 높아도 방해할 사람들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누군가 자신의 집중을 방해하기 위해 파티션 위로 머리를 내밀 수 있는 상황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

개발자들이 지적 노동을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공간은 굳이 물리적으로 폐쇄적이지 않아도 된다. 내가 마음 먹었을 때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굳이 사무실 대신 회사 주변의 시끄럽고 번잡한 카페를 찾아가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공간에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을 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 수 있지만 오히려 익명의 타인들 틈에서 더 높은 집중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누군가 내 모니터를 힐끗 바라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머리를 쑥 내밀며 "잘 되고 있나요?"라고 묻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재떨이 갈아 드릴까요?"라든가 "커피 더 드릴까요?" 정도의 방해는 괜찮다. 

* 이런 서비스는 호텔 라운지에서 가능하다. 한 달에 한 번쯤은 호텔 라운지에서 코딩하는 호사를 누려 보는 것도 좋다. 마치 개인 비서를 두고 코딩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개발자가 아니지만 전략 기획을 집중적으로 해야 할 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전화기를 내려 놓고, 휴대전화를 끄고, 브라우저도 열지 않고 오직 노트패드(혹은 아주 단순한 편집기)만 열어 놓고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남이 방해할 수 있는 요소를 사라지게 만들고 스스로 다른 관심의 연결 고리를 끊은 후 순수한 정신 노동의 세계로 접어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며 "잠시 이야기할 시간 있나요?"라고 물을 때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다,

"야! 너 때문에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잖아!"

물론 노트패드는 여전히 백지 상태지만 내 머릿 속에는 거기에 쓸 수 있는 어떤 것들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고 그 노크 하나 때문에 다시 처음부터 집중의 과정을 거처야 하기 때문이다. 일일 업무 보고에 '오늘 하루 종일 생각만 했음'이라고 쓸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그러나 지적 노동이 투입 대비 산출물이 항상 존재한다고 믿는 시스템(회사, 조직)에서는 정말 집중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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