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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Insight

아이디어와 현실적 포기

집에 화분 몇 개가 있는데 각각 물 주는 시간과 양이 다르다. 가끔 뭔가에 몰입하고 있다 보면 화분에 물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과 달리 식물은 목 마르다고 칭얼대지 않기 때문에 망각의 기간이 꽤 길어지는 경우도 있다. 어느 날 문득 주의 깊게 화분을 보니 아뿔싸! 벌써 이파리는 시들어 버렸다. 겨우 물을 주고 다시 살아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죽어 버리기도 한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다 문득 그런 상황을 막아줄 수 있는 어떤 도구(utility)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다.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면서 화분에 물을 주는 시간을 알 수 있는 것. 타이머가 달린 자동 물 공급기는 너무 대량의 작물 재배에나 필요한 것이고 불필요하게 복잡하다. 나는 그저 물을 줄 타이밍만 알면 된다. 그럼 하루 단위로 움직이는 타이머가 있으면 될까? 가로 세로 5cm 내외의 작은 타이머를 5일로 맞춰두고 시간이 되면 울리는 타이머. 건전지를 쓸 필요없이 전면부에 태양열 집광판을 달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화분 표면의 수분을 체크할 수 있도록 금속 막대를 달고 그걸 화분에 꽂아 넣을 수 있도록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기계가 생물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좀 더 친환경적인 아이디어는 없을까? 예전에 어딘가에서 수분 상태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염료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 있다. 수분 상태에가 충분할 때는 파란색이다가 수분이 없어질수록 점점 흰색으로 변해가는 염료다. 막대에 이 염료를 바르고 화분에 꽂아 두고 흰색으로 변했을 때 물을 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이런 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데 문득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왜 화분에 신경을 쓰는 거지?"

사람마다 화분을 집에 두는 이유는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도 생명이 있는 존재고 내가 직접 관리를 했을 때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매일 아침 화초를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두고 잎에 묻은 먼지를 닦고 정기적으로 물을 주고 가끔 영양액도 주고 오래되면 흙도 갈아 줘야 한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야 화초가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 갈 수 있다. 또한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작은 화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강아지나 고양이나 금붕어를 키우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위로를 얻듯 화초도 마찬가지다. 화초에 정성을 들이는 것은 노트북에 백신을 깔거나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과 다르다. 생명 대 생명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쯤 생각하니 내 아이디어가 얼마나 기본에 충실하지 못했는 지 깨달았다. 그리고 기껏 물 주는 시간이나 간격이 헷갈리는 정도라면 캘린더 서비스를 이용하는 게 훨씬 낫다는 것도 알게 된다. 캘린더에 "산스베리아, 물주기 10일 간격"이라는 아이템을 생성하고 "반복 설정"을 해 두면 그만이다. 시간이 되면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이 올 것이고 그 때 화분에 물을 주면 된다. 간단한 앱을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화초의 상태를 찍을 수 있고 여러가지 관리 항목을 저장해 두고 시간이 되면 알려 주는 기능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간혹 멋지게 느껴지는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흥분에 빠졌다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런 도구가 사람들이 원하는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현실을 깨닫고 포기하는 것도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기술 중 하나가 아닐까.


p.s : 검색을 해 보면 자동 물주기 도구와 타이머 따위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 장기간 집을 비울 경우엔 필요하겠지만 일상적으로 쓰일만한 도구는 아니다. 그렇게 귀한 화초라면 이웃에게 맡기는 게 더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