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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1993년 군대에 들어 갔을 때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격언 중 하나를 이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군대라는 가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가야하고 또한 26개월(지금은 24개월이지만)을 무조건 견뎌야 하는 상황에서 이 조언은 적절할 수 있다. 고통스럽게 견디려하지 말고 그 상황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찾으며 '생활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 조언을 참으로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런 상황에서만 이 조언은 의미있지 그 이상으로 확대되면 큰 문제가 된다.

오래 전 내가 군대 생활을 했던 부대는 꽤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병사들끼리 일상적으로 욕설과 폭언, 구타가 존재했다. 이등병 때 하루라도 맞거나 얼차려를 받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구타와 얼차려를 하는 별의 별 이유가 다 있었지만 대개는 매우 사소한 실수 때문이었고 그 이유는 구타나 얼차려가 아니라 말로 충분히 풀 수 있는 것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우리는 그 상황을 결코 피할 수 없었다. 탈영을 하거나 맞짱을 뜨거나 중대장이나 또 다른 상급 기관에 고발할 수도 없었다. 그럼 그 상황을 즐겨야 하나?

우리는 매일 저녁 반복되는 구타와 얼차려를 생각하는 대신 동료들끼리 즐거운 일을 찾고 서로 북돋우며 그 시절을 참았다.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동료들이 병장이 되었을 때 모두 모여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도 지금 후임병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분명하지 않나. 그러나 우리 이등병 때처럼 저녁마다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지는 말자. 군대 생활을 즐길 수는 없더라도 고통스럽게 만들지는 말자."

물론 우리도 후임병에게 얼차려를 준 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바로 동료 중 누구도 구타나 개인적인 얼차려를 이유로 내부반 관물함에 다리를 올리고 원산폭격을 시키는 짓 따위를 한 사람은 없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소대장이나 중대장이 기강이 헤이해졌다며 전 중대원에게 얼차려를 준 적은 있었다. 우리는 군대 생활이라는 것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즐기기엔 너무나 모순된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랬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잘못된 적용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격언을 다시 듣게 된 것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시작한 이후다. 첫 직장이었던 한 포털 업체에서 기획을 하던 나는 당시 상급자와 기획 주제에 대해 심각한 논쟁을 했고 결국 회사를 그만 둬야 하는 가 고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저녁마다 소주를 입에 달고 살았고 출근한 후에도 표정을 늘 어둡기만 했다. 이를 보고 있던 다른 부서 선배가 회사 휴게실로 불러 이런 저런 조언을 했다. 조언 중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지 않니."라는 이야기를 했다. 아마 나는 그 선배에게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피할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다면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몇 개월 후 나는 퇴사라는 피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군대와 달리 사회 생활이나 직장 생활에서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방법 대신 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많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그런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기거나, 공부를 다시 시작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자영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는 즐기는 척하며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미운 사람에게 웃음 짓고, 적대적인 관계를 줄이기 위해 낯 간지러운 칭찬과 아첨을 하며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전자의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게 어디 있냐?고 이야기했고 후자의 사람들은 즐길 수 없다고 피하기만 하는 건 답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조언이 매우 패배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 생활이나 회사 생활에서 "피할 수 없어서 즐겨야 하는 것" 대부분은 사실 피하기 싶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 이유다. 내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즐기려는 자세를 취하는 순간 스스로 그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벗어난다기 보다는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피할 수 없는 그 문제에 또 다시 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 사람에게도 피할 수 없으니 즐기라고 말해야 할까? 그 피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책임이 모두 내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내가 회피한 바람에 뒤에 올 사람이 그 피할 수 없는 문제와 부딪치게 될 수 있다.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좋은 것이지 피하는 게 좋은 건 아니다. 왜냐면, 문제는 풀라고 있는 것이니까.


피할 수 없으면 해결하라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격언은 "피할 수 없으면 해결하라"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웹 기획자로서 나는 많은 피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치곤 한다. 말도 안되는 기획으로 목표를 달성해야 할 때, 기획을 구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개발자와 만날 때, 기획을 승인해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관리자와 만날 때, 대안은 없지만 그 기획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만날 때 나는 가끔 이 피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에서 즐겨야 하는 걸까?라는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내가 피하는 순간 나는 조금 편해지겠지만 그 문제는 내 뒤에 올 사람에게 넘겨지는 것을 알고 있다. 아마 이 회사에서 다시는 그 문제와 부딪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그 문제는 다시 내 앞으로 다가올 것이고 나는 또 한 번 "피할 수 없으니 즐겨야지"하며 문제를 회피할지 모른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이 더 낫지 않냐는 격언은 완전히 파기되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문제와 만난다면 지금 해결하든가 나중에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한 번 물러서면 또 물러서게 되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결국 문제가 무엇인지 인지하지도 못하게 된다. 문제를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질문을 하지 못한다. 질문은 뭔가 이상하다는 궁금함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피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피하지 못하는 대신 즐기는데 익숙해진다면 세상에 이상한 것은 없게 된다. 모순 앞에 투쟁하지 못하고 투쟁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 의식이 약해지고 약해진 문제 의식은 자신의 사상을 고루하게 만들며 결국 창조적 발상을 억제한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창조력과 모험 정신이 완벽히 거세된 회색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특히 창조적인 발상이 필요한 사람(기획자)에게 이런 과정은 돈만 축내는 밥벌레가 되는 지름길이다.

피할 수 없으면 해결하라. 이것이 제대로 된 격언이다. 일이든, 생활이든, 사랑이든, 기획이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 모순된 구조를 받아 들이라는 말이다. 내가 나쁜 존재가 되라고 강요하는 말이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것과 대립해야 한다. 물리학의 법칙처럼 대립각이 첨예할수록 우리는 더욱 강한 힘을 받으며 밀고 일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