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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uacu ONLY

모든 집에는 블랙홀이 있다

암흑물질로 구성되어 주변의 모든 물질과 시간조차 빨아 들인다는 우주의 블랙홀(black hole)이 모든 가정에 하나씩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여러분 모두 "맞아!"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블랙홀을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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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블랙홀>

느 날부터 집안의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한 건 오래 전부터다. 그러나 별로 중요한 물건들이 아니었기에 그냥 잊어 먹고 있었다. 기껏해야 손톱깎이나 건전지, 귀이개, 자, 머리핀 같은 물건이었다. 가끔 돈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건 가족 중 누가 들고 간 것이라 생각하고 말았다. 없어지는 물건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주제의 물건이 아니고 정기적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대부분의 물건은 언제 사라진지 알 수 없었고 나중에 그 물건을 찾고자하면 비로소 없어진 사실을 알 정도였다. 그래서 나도, 가족도 물건이 사라진 것에 대해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몇 시간 전 분명히 거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실 때 있었던 차 받침이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즘 피곤해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몇 시간 전 바닥에 뒀던 대나무로 만들어 진 차 받침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분명히 나는 그 차 받침을 바닥에 두고 그 위에 찻잔을 두고 녹차를 한 잔 마셨다. 차를 다 마신 후 찻잔을 씻었고 샤워를 하고 나와 옆 방에서 물건을 좀 정리한 후 차 받침을 치우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차 받침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파에 앉아서 그동안 사라졌던 다른 몇몇 물건들을 생각하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생각했다. 졸렸다. 혹시 쥐가 물어 간 건 아닐까? 이 오피스텔에 2년 째 살고 있지만 쥐는 커녕 바퀴벌레나 귀뚜라미 한 마리도 본 적 없다. 옆 집 사람이 죽어도 모른다는 건조한 오피스텔이니 쥐와 같은 거대 생물이 살아 남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그러면 혹시... 우렁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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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우렁이...>

우렁각시가 치우려면 베란다에 쌓여 있는 쓰레기나 비울 일이지 왜 멀쩡한 차 받침을 치우겠나. 또한 우렁각시가 그 동안 사라졌던 물건의 주인공이었다면 그 콜렉션의 자유분방함이 거의 변태 수준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옥션에 올려서 돈이라도 벌 생각이면 DSLR 카메라나 HDTV나 노트북을 챙길 것이지 드럽게 귀이개, 손톱깎이 같은 걸 숨길 이유는 없지 않나. 어쨌든 우렁각시는 분명히 아니다. 혼자 사는 생활이 오래되다보니 망상 증후군이 나타나는 것 같다. 어쨌든 이런 생각을 계속 하다보니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과연 밤 11시에 고민할만한 문제인가?라는 것이다. 차 받침이야 5백원만 주면 새로 살 수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주방 서랍을 열면 똑같은 차 받침이 4개 더 있지 않나? 1년 전에 5개 세트를 샀고 아직 4개나 남아 있다. 게다가 나는 매우 졸렸다!



차 받침을 누가 물고 갔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 거실 바닥에 놓여 있던 휴대 전화가 발에 걸리며 앞 쪽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소파 맞은 편에 있던 거실장에 부딪쳤다. 휴대 전화, 거실장, 실내화를 신고 있는 내 발, 그리고 내 눈에 들어 온 바로 그것! 드디어 나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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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우리집 거실장>

바로 이것, 거실장 아래에 존재하는 1cm 가량의 틈새가 그동안 사라진 물건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유추하건데 거실 바닥에 이것 저것 마구 흩어놓고 사는 내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걷다가 발로 툭 건드린 물건 - 귀이개와 손톱깍이를 포함하여 - 이 저 구석으로 날아간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사라진 대부분의 물건은 저 1cm의 공간에 들어갈 정도로 얇은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동전이나 지폐도 충분히 저 공간으로 들어갈만한 물건이었다.

옷걸이를 가져와 구긴 후 저 틈을 마구 휘져어 긁어내니 온갖 물건 - 귀이개와 손톱깍이를 포함하여 - 이 다 나왔다. 동전도 여러 개 나왔고 아까 사라졌던 차 받침도 나왔고 일년 전에 잃어 버린 후 분실 신고했던 신용 카드도 나왔다. 계속 휘져으니 별별 물건이 다 나왔는데, 수은전지, 안경알, 말라 비틀어진 청양고추, 중국집 전단지 그리고 콘돔까지 나왔다.  



모든 집에는 블랙홀이 있다

깨달음을 얻자 곧 집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블랙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싱크대 밑, 소파 밑, 침실 침대와 장롱 밑, 냉장고 밑 등등. 1시간 후 내 수중에는 온갖 물건들이 들려 있었다. 가장 고가의 발견 물품은 1GB USB 메모리였다.

혹시 여기까지 읽고도 '왜 블랙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라고 의아해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모든 집에는 블랙홀이 있다. 어떤 작은 물건이 사라지는 집이 있다면 그리고 그 물건이 지갑 속에 있던 돈이나 (어린 자녀를 의심해 보라!), 햄조각이나 과자 봉지에 구멍이 나 있고 과자라든가 (어린 자녀나 쥐를 의심해 보라!), 핸드폰 혹은 DSLR 카메라 (어린 자녀나 쥐나 도둑을 의심해 보라!)가 아니라면 집안에 존재하는 블랙혹을 의심해 봐야 한다. 블랙홀은 주로 1cm에서 5cm 정도의 가구 틈새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가구의 무게가 무거워서 이사를 가지 않는 한 옮길 가능성이 없다면 98% 확률로 바로 그 장소가 집안 블랙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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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4. 이 블랙홀이 아닙니다>

내 말을 믿어도 좋다. 신뢰할 수 없는 통계 자료에 의하면 평범한 가정 집이 이사를 갈 경우 이삿짐 센터 직원들은 이 집안 블랙홀에 존재하는 각종 동전과 지폐를 통해 짭짤한 부가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실제로 나도 몇 년 전 이사를 할 때 소파 밑에 있는 동전을 주머니에 넣으려는 이삿짐 센터 직원을 발견하고 이렇게 고함친 적 있다, "웨이러 모먼트!" 집안 블랙홀에 존재하는 동전도 내 것임을 정확히 고지한 후 발견하는 모든 동전은 상납하라고 지시했다.

어린 아이가 존재하는 집의 경우 지금까지 이야기한 집안 블랙홀 말고 또 다른 블랙홀이 존재할 수 있다. 어린 아이. 대략 3세~5세 사이의 어린 아이는 생물학적 블랙홀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목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부분의 물건을 빨고 씹고 침을 묻힌다. 그 정도면 괜찮은데 가끔 삼켜 버리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부부는 진주 반지의 알이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하루종일 찾느라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도무지 진주 알을 찾을 수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제 말을 시작한 아이를 의심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의 대변에서 진주 알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의 위장과 소장과 대장을 통과한 후 나온 진주 알이 플라스틱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생물학적 블랙홀이고 뭐고 대판 싸웠다고 한다.



소소한 기억의 블랙홀

든 집에는 블랙홀이 있다. 이 블랙홀에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기억이 남아 있다. 블랙홀에서 발견한 안경알 때문에 술 먹고 안경알 빠졌다고 투덜대며 다시는 술 마시지 않겠다는 허언을 했던 기억이 살아났고, 손톱깎이가 사라지는 바람에 임시변통으로 가위로 손톱을 깎았던 기억도 났고, 블랙홀에서 찾은 귀이개가 5년 전 부산에서 어머니가 들고 왔던 것이었음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어머니는 유독 그 귀이개만 쓰곤 하셨다.

집안 블랙홀에 있는 물건들은 없어도 사는데 별 지장이 없고 그리 값비싸거나 소중한 물건이 아닐 수도 있다. 무슨 숨겨둔 펀드가 열어 보니 100배 뛰었다는 식의 전설이 집안 블랙홀에 있는 건 아니다. 아마 반드시 찾아야 할 물건이었다면 집안을 다 뒤집어 놓더라도 반드시 찾았을 것이다. 집안 블랙홀에 있는 물건들은 없어도 별 문제가 없는 그런 일상의 기억이다. 자질구레한 것이고 잊어도 별 상관없는 그런 것이다. 어쩌면 집안 블랙홀은 그런 목적으로 늘 모든 집에 존재하는 것인지 모른다.

가끔 그 기억을 위해 블랙홀을 탐사해 보는 것도 괜찮다. 세상살이 힘들어 뭔가 선물을 기대할 때 이 블랙홀을 뒤져 보는 것도 좋다. 어쩌면 우연히 수표라도 한 장 발견할 지 모른다. 하긴 그것도 원래 자기 돈이긴 하지만. 이 블랙홀을 뒤질 때 각오해야 할 것은 별로 없다. 그저 허리를 굽히고 열심히 구석을 쑤시기만 하면 된다. 다만 감당하기 곤란한 먼지가 쏟아져 나온다는 단점이 있긴 하다. 자질구레한 기억의 특징이 바로 그런 것, 퀴퀴한 먼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