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emo

지하철 에스칼레이터 움직이지 말자

어제 일이다.


평소 퇴근 길에 지하철을 갈아타는 동대문 운동장 역. 2호선으로 갈아타는 지하철 에스칼레이터에서 나는 오른쪽에 서 있었다. 처음엔 다른 사람들처럼 오른쪽에 섰는데 어떤 이유 때문에 한 걸음 왼쪽으로 옮겨 서 있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항상 비어 있어야 하는 왼쪽 줄이 막힌 것이다. 나는 어떤 이유 때문에 에스칼레이터에 오르는 순간 평소 서 있던 것과 달리 왼쪽에 섰다. 10초가 지났을까? 뒤에서 누군가 쿡쿡 찔렀다. 무엇 때문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가만히 있었다. 조금 있다 바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가야 하거든요, 좀 비켜 주세요"

아마도 2~3초 쯤 나는 아무런 대꾸없이 왼쪽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곧장 오른쪽 자리, 그러니까, 에스칼레이터에서 대부분 그냥 그 자리에서 이동하고 싶은 사람들이 서는 바로 그 자리로 옮겨 갔다. 내가 오른쪽 자리로 옮긴 후 20여 명의 사람들이 왼쪽 공간을 통해 걷거나 뛰면서 에스칼레이터를 탔다. 에스칼레이터에서 걷거나 뛰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다.

2008년 1월 3일 오후 9시, 지하철 4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는 서울 동대문 입구역에서 나는 이런 경험을 했다. 텔레비전의 현실과 내 현실은 정말 다르다는 것 말이다. 나는 2007년 KBS의 <위기탈출 넘버원>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에스칼레이터의 한줄 서기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 프로그램은 한 줄 서기가 안전상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1. 한 줄을 서는 목적은 다른 한 줄을 통해 걷거나 뛰는 걸 조장한다.
2. 에스칼레이터에서 걷거나 뛰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3. 그로 인해 한 줄로 서서 보행하는 사람들마저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 있다.

지하철에서 에스칼레이터를 탈 때 한 줄을 서도록 서울시나 각종 단체에서 종용한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서울의 경우 각종 지하철 노선이 중첩된 곳이 많고 나름대로 바쁜 사람도 많기 때문에 대개 "2인이 한 줄"로 설정된 지하철 에스칼레이터에서 그리 바쁘지 않은 사람들이 오른쪽에 한 줄로 서는 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그 동안 교육되어 왔다. 마치 사람은 왼쪽 통행, 차량은 우측 통행처럼. 그런데 사실 이것은 완벽히 잘못된 대중 교육이었다. 누가 이런 교육 방침 - 에스칼레이터에서 바쁜 사람을 위해 오른쪽에 나란히 붙어 있자 - 을 제안했는지 조사해봐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내 경험의 기준으로 봤을 때 최소한 5년은 되었다. 누구든 지하철에서 에스칼레이터를 타면 바쁜 일이 없다면 누군가 바쁜 사람을 위해 오른쪽으로 한 줄 서기를 하라고 교육 받은 지 5년은 분명히 넘었다. 그리고 나도 당연하게 오른쪽으로 선다.

누가 이런 지시를 했는지, 누가 이것이 옳다고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제안 즉, 지하철 에스칼레이터에서 한 줄 서자고 말한 사람이 어떤 바쁜 사람을 고려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안전상 문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또한 분명하다. 움직이는 계단인 에스칼레이터를 타는 사람이 걷거나 뛰는 것은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아도 명백히 위험한 행위다.이렇게 비유하면 어떨까? 시속 100km로 달려 오는 물체를 나도 시속 100km로 달려가 부딪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 같은가? 움직이는 에스칼레이터에서 또한 걷거나 뛰는 행위는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처음에 누가 지하철 에스칼레이터에서 한 줄 서기를 제안했는지 찾을 수 없었다. 아마 찾을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의 실명을 거론하며 이렇게 질문했을 것 같다,

"한 명이 1분 빨리 가려고 100명이 죽을 수 있어도 관계 없다는 말인가?"

2년 전 내가 경험한 일도 있다. 명동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에스칼레이터를 탔다. 갑자기 에스칼레이터가 멈추더니 역주행을 시작했다. 이 사건은 신문지상에도 난 적이 있는데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에스칼레이터가 역주행을 했을 때 오른쪽에 한 줄로 서서 난간을 잡고 있던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바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왼쪽에서 빈 줄을 따라 걸어 오르던 사람들은 뒤로 구르기 시작했다. 마침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굴러 넘어지던 사람들을 잡아 주었다. 짧은 소란은 금새 끝났지만 그 상황에서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에스칼레이터를 오르던 사람들이 뒤로 굴러 떨어지는 걸 보며 이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텔레비전에서 에스칼레이터에서 걷거나 뛰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어제 이야기다. 나는 지하철 에스칼레이터에서 오른쪽에 서는 대신 왼쪽에 섰다. 나름대로 도전이었다. 당연히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거 뭐하는 인간이야?'라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나는 견디려고 노력했다. 내 이익이 아니라 당신들의 안전을 위해 이렇게 당신들을 막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결론은? 5초도 견디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물러섰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모든 에스칼레이터에서 이런 식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화점에 쇼핑하러 가서 에스칼레이터를 타면 누구도 앞서 가려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지하철 에스칼레이터는 1등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다들 나서려고 한다. 빨리 올라가려고 하고 왼쪽에 빈 공간이 없으면 불쾌하게 생각한다. 지하철이 겹치는 부분에서 갈아 타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니라고 본다. 만약 지하철 갈아타는 시간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면 에스칼레이터에서 걷고 뛰는 문제는 다른 공간에서도 똑같이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유난히 지하철 에스칼레이터에서만 나타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지하철 관계자나 우리 스스로 지하철은 매우 바쁜 공간이라고 공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쁘다는 이유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에스칼레이터에서 바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서로 배려할 필요는 없다. 목숨과 바쁜 무엇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에스칼레이터에서 걷거나 뛰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바쁘다는 이유로 걷거나 뛰고 싶다면 에스칼레이터 대신 바로 옆에 있는 계단을 이용하는 게 맞다. 에스칼레이터애서 걷거나 뛰다가 갑자기 쓰러지면,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함께 쓰러지고 철로 만들어진 계단에 머릴 부딪쳐 생명을 잃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해 보길 권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나는 내일도 갑자기 서울 지하철 에스칼레이터 어딘가에서 오른쪽에 서는 대신 왼쪽에 서 있을 지 모른다. 당신은 오늘 어떤 분이 그랬던 것처럼 내 등을 두들기며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저기 바쁜데 좀 비켜 주세요"

나는 그 자리를 비켜주겠지만 속으로 이렇게 당신에게 물을 것이다,

'당신이 1분 빨리 가려다 100명을 죽일 수 있는데...'



지하철 에스칼레이터에서 움직이지 말자. 당신과 나의 안전을 위해. 제발.


'Memo' 카테고리의 다른 글

G마켓 어디로 넘어가나?  (1) 2008.01.10
이금룡 사장 미술 경매 시장에 도전  (2) 2008.01.08
SKT 토씨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4) 2008.01.03
허걱, 피망  (2) 2008.01.02
새해에는...  (2) 2007.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