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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 관람 후기, 계유정난 속 진실과 허구



대도시 한가운데 사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높은 물가, 매연, 소음 같은 것을 감당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형 영화관까지 걸어서 10분 거리라는 것은 기대하는 영화가 있을 때 더욱 큰 장점이 된다. 주변 카페에서 모닝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들고 8시 30분 조조로 <관상>을 보러 갔다. 2시간 20분 후 "와, 잘 봤다"라고 말하며 나왔는데 아직 11시 밖에 되지 않았다. 집으로 천천히 걸어오며 아내와 영화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송강호 정말 연기 잘한다."
"구레나룻 수염 기른 송강호는 윤두서 자화상과 꼭 닮았다."


송강호의 연기력은 <넘버 3> 때부터 알아보았으니 재론할 필요가 없다. 윤두서의 자화상과 닮은 꼴이라는 건 영화를 보는 중 계속 생각했던 것인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정말 비슷하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특히 마지막 장면을 보면 참 인상이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생김을 하나씩 뜯어 비교하면 많이 다르지만 첫 인상은 <관상> 속의 송강호와 윤두서는 정말 비슷하다. 






계유정난을 다룬 팩션


영화 <관상>은 조선 초기 발생한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하는 허구와 역사적 사실이 뒤섞인 영화다. 이런 영화 분야를 팩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다. 중종반정 즈음의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왕의 남자>도 역사적 사실 속에 픽션을 결합한 팩션이다. 팩션 영화의 장점은 같은 문화를 향휴하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굳이 배경 설명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그냥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된다. 단점은 다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지 알고 있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지기 쉽고, 해석의 차이에 따라 논란이 잇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계유정난이란? 

1453년(단종 1) 11월 10일 (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이 친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이 영화가 주제로 하는 계유정난 또한 관련 인물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정말 수양대군이 오직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 그 사건을 일으켰냐는 것이다. '명분'이 부족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김종서를 비롯한 가신들이 군사와 정치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왕권을 지키기 위한 극단적 방편이 아니었냐는 해석도 있다. 물론 <관상>에서는 이것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수양대군은 간웅을 넘어서 전형적 역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단종에게 수양대군이 역모를 꾀할 것이라고 말하자 숙부를 음해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화를 낼 때 눈뜬 장님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답답한 느낌이 든다.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을 진심으로 믿은 건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화해를 도모한 것인지 역사적 해석은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있지만 영화에서는 관상에 대한 불신, 숙부에 대한 의심, 숙부에 대한 믿음, 다시 숙부에 대한 의심 그리고 최종 결정으로 이어진다. 역사적 해설과 다소 다른 부분이 있지만 팩션에서 허용되는 수준이 아닐까 한다. 역사에서는 단종이나 김종서 일파는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의심만 할 뿐 그 시기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다 단숨에 제압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에서 김종서는 대인배다운 죽음을 마지하지만 역사에서 기술하는 김종서의 죽음와 다소 차이가 있다. 이 또한 영화에서 표현하는 죽음이 좀 더 수양대군의 숙적답다. 수양대군의 책사인 한명회에 대한 묘사도 역사의 그것과 큰 차이가 있다. 영화의 중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등장하는 한명회는 그 악명에 비해 3명의 왕을 보필하며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압구정'은 알고 있을 것이다. '압구정'은 한명회가 소유했던 한강변 정자의 이름이며 현재 서울 압구정동도 그 정자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560여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고 사건 이후 왕이 된 세조가 각종 사료를 임의로 변경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때문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과장되었고 무엇이 거짓인지 정확히 구분하는 건 꽤 힘든 일이지만 영화에서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숙부가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냈고, 그 쿠데타 과정이 굉장히 흥미진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팩션 영화는 그런 큰 흐름 속에서 또 다른 그럴싸한 이야기를 풀어낼 뿐이다. 





믿고 보는 배우들


송강호, 이정재, 김혜수, 백윤식.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어떤 영화에 나오든 연기력은 믿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한 명씩만 나와도 그런데 한꺼번에 나온다니 <관상>은 출연진에 대한 소문이 떠돌 때부터 관심작이었다. 영화가 열리고 난 후 관객들의 반응은 "역시나!"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송강호 VS 이정재



역사적 대결구도는 수양대군과 김종서지만 영화 속 배우의 대결구도는 송강호와 이정재였다. 송강호의 연기력은 큰 강물과 같이 영화 전체를 끌어간다면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얼굴이 드러나는 이정재는 자신에게 카메라 앵글이 맞춰질 때마다 점점 긴장감을 높였다. 송강호는 허구의 인물인 관상쟁이를 연기하기에 변화하는 인물을 연기하지만 이정재는 역사 속 박재된 인물인 수양대군을 연기하므로 초지일관 하나의 성격을 보인다. 


역사적 사실은 이미 결정나 있기 때문에 송강호의 패배는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얼굴만 보고 그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할지 맞출 수 있는 관상쟁이가 있다면 역모를 품고 사는 자는 어떻게 할까? 이 영화가 시작된 이유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면 두 배우의 연기력 경쟁도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다. 





조정석 VS 김혜수











김혜수의 연기력은 따로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조정석은 아직 애매한 편이었다. 그러나 조정석은 이번 영화로 확실히 믿고 보는 배우가 되는 것 같다. 두 배우는 허구의 인물을 연기했고 영화의 주요 흐름을 지배하지 않지만 지루하게 흐르기 쉬운 서사구조를 확실히 재미있게 만든다. 송강호는 이정재와 대결에 들어가며 긴장감을 잃지 않기 위해 영화 초반의 유머러스한 모습을 보일 수 없지만 그의 동생으로 분한 조정석은 계속 유머러스한 톤앤매너를 유지할 수 있고 그런 역할을 충분히 잘 소화했다. 조정석은 <관상>에서 관객들이 크든 작든 웃었던 장면 중 대부분 얼굴을 비추고 있다. 


김혜수의 역할에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초반 이후 역할이 급격히 줄어들고 출연 비중도 낮아진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그녀가 영화 극초반에 보여줬던 그 정도 역할만 보더라도 그녀가 이 영화에서 해야 할 역할의 절반 이상은 해 버렸다. 영화와 관객의 첫 만남을 즐겁게 만들어줬고 주인공이 사건과 만나는 이유를 만들어줬다. 판 벌리고 사건 만들어줬으면 되었지 더 무엇을 바랄까? 게다가 이 영화는 다룰 인물이 너무 많고 그 와중에 김혜수가 계속 초반과 같은 비중으로 나온다면 어떤 식으로든 러브 라인을 만들 수 밖에 없는데 그러면 너무 복잡해진다. 아마 연출과 편집 모두 그런 것을 원하지 않은 것 같다. 






백윤식 VS 이종석












너무 큰 기대를 했기에 평범했던 두 사람이다. 백윤식은 당시 어린 왕인 단종을 보필하며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최고 권력자였다. 그러나 그의 위세를 드러내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연기력이 나쁘지 않았지만 <관상>에서 주요 대립 상대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백윤식이 강한 카리스마를 드러낼 기회가 적었던 것 같다. 이것은 관상쟁이의 아들로 나오는 이종석도 크게 다를바 없다. 이종석은 영화 전체에서 주인공인 관상쟁이가 복마전의 정치판에 계속 머무르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 관계없는 인물이 되어 버린다. 그나마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또 다른 존재의 이유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약간 비참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종석의 시크하며 매력적인 모습을 기대하고 영화관은 찾았을 팬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건 이종석이 선택한 게 아니라 시나리오의 설정이니 그러려니 이해하는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도록 백윤식이 나올 때마다 '아휴, 30살이면 정말...' 따위의 생각을 지울 수 없어서 고생했다. 






실망스러운 장면


이 영화는 잘 편집되어 있고, 적절한 간격으로 인물들의 사건이 전개되어 2시간 20분 가량의 상영 시간이 지겹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건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린 왕이 김종서와 관상쟁이의 충고를 듣지 않자 관상쟁이와 그 일당은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기로 한다. 물론 이 방법은 완벽히 허구다. 원작가나 시나리오 작가의 창조적 아이디어가 반영된 것이리라. 그런데 너무 뜬금없었고 공감하기 힘들었다. 


영화의 흐름에도 적절치 않음은 물론이고 도대체 왜 저런 허튼 짓에 목숨을 거는 건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관상>이라는 단어에 너무 집중해서 저런 사건을 집어 넣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직접 영화를 본다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이마에 누군가 그런 짓을 했는데 수양대군이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도 아무리 영화적 상상력이라지만 말도 안되는 것 같다. 





재미있는 질문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이 질문들을 미리 준비하고 가면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다. 




1. 이봐, 계산은 누가하는 거지?

술 마시기 전에 누가 계산하는지 확실히 할 것. 세상 어디에도 공짜는 없는 법.


2. 뒹굴뒹굴

관상쟁이와 그의 동생은 몇 번이나 뒹굴뒹굴할까?


3. 정말 몰랐을까?

영화의 마지막 수양대군이 관상쟁이에게 뭘 몰랐을까?라고 부하에게 중얼거린다, 정말 관상쟁이는 그걸 몰랐을까? 아니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4. 관상쟁이 아들의 선택은 자의였을까?

전혀 웃기는 장면이 아닌데 혼자 빵터졌던 장면. 근정전에 난입한 수양대군이 관리들에게 자기를 따를 자들은 이쪽으로 옮기라고 하는데 관상쟁이 아들의 선택은?



영화 그 이후 


계유정난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의 처벌을 형식적으로 반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곧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의금부를 통해 사약을 내렸으며, 살해된 조정 중신의 처첩, 자녀들을 노비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정난공신 1등에 자신과 정인지, 그리고 사돈지간이었던 한확 등을 임명하고, 나머지 신하들을 2등, 3등으로 책록하여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독점했다. 수양 자신은 영의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여 사실상 재위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역적으로 단죄된 안평대군 등은 선원보략에서 삭제되었다가 훗날 숙종 때 복권된다.


수양대군과 정인지 등은 단종을 압박하여 살해된 조정 중신의 처첩, 자녀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집현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때 김종서의 첩과 아들 김승규의 처와 첩, 황보인의 처와 며느리 등이 노비와 관비로 분배되었고, 안평대군의 며느리도 이때 관비로 분배된다. 이렇게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여 1455년 마침내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84%EC%9C%A0%EC%A0%95%EB%82%9C)






평가와 별점


- 독특한 소재로 대중적 관심을 끌 수 있었고, 입증된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돈 내고 보기에 아깝지 않은 영화. 

- <광해>에 이어 올해도 1천만 명을 돌파하는 조선의 왕이 나오는 영화가 될까?

- 김혜수는 가슴 밖에 보이지 않고 백윤식은 30살 밖에 보이지 않고 이종석은 나오긴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10점 만점에 8.5점. 

0.5점은 한국영화보너스 포인트.





끝으로 영화 보실 분들을 위한 큰 스포일러 하나 방출,

 

 

"수양이 김종서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