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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uacu ONLY

5.18 광주를 알려 준 한권의 책

요즘 일베라는 사이트 때문에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이 재거론되고 있습니다. '팩트'라는 단어가 난무하는 이 현실이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9년 전 썼던 글을 다시 올립니다. 황석영 작가가 썼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봐야할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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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주는 어린 시절의 내게 낮은 수근거림일 뿐이었다.

 

광주에서 간첩들이 배후조정을 했다네...

사람이 몇명 죽었다네...

전라도 깽깽이들 잘 죽었지...

김대중이 시킨 일이라고 하더라...

그럼 그렇지 김대중이 빨갱이니 저 난리지...

 

그리고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고 광주는 잊혀졌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후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전두환의 육사동기생인 노태우가 대통령인 시절이었다. 10년전보단 덜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학교 앞 지하철 역 입구에서는 불심검문이라며 학생들의 가방을 뒤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교문을 닫아걸고 데모를 하다 학교 안까지 쫓아 들어온 전경들에게 잡혀가는 일도 가끔 벌어졌다. "살인마 노태우를 처단하자"는 구호를 처음 들었다. 노태우를 '노가리'라고 하고 전두환을 '대머리'라고 부르는 것도 처음 들었다. 국가원수에게 무슨 원한이 맺혔길래 수천명이 저리도 목에 핏대를 세우고 욕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해 5월이 되었다. 강경대가 죽고 이승희가 죽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죽고 죽고 또 죽고... 나중에는 흘릴 눈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유서대필사건, 박홍총장의 어둠의 세력 발언,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 발언... 그리고 그 죽음에도 불구하고 91년의 봄은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천둥처럼 다가왔다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그 거리에서 우리는 당황했다.

 

이미 늦어진 중간고사를 대충 치르며 학교 앞 술집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시험이 끝나면 의례히 그렇지만 유난히 술집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고 밤마다 거리에서 꺼이꺼이 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술을 마셨고 이야기를 했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뭐가 뭔지 여전히 몰랐다. 모든 이야기에는 '80년 광주'가 있었고 그들은 '혁명 광주'라고 불렀다. 왜 광주가 혁명이지? 여전히 내게는 '광주사태'가 더욱 낯익은 것이었다. 그들은 광주를 '반미(反美)의 도화선'이라고 불렀다. 광주사태와 반미가 도대체 무슨 관계인 거지? 그들은 광주를 '민주(民主)의 성지'라고 불렀다. 광주사태에서 사람이 죽은 것과 민주주의가 무슨 관계인 거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이야기였다. 80년광주는 여전히 내게 폭동이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해 5월 나는 광주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학교 정문에 딱 붙어있던 나라사랑(사회과학전문서점)에 가서 물어봤다, "저기요... 광주사태에 대해 알고 싶은데 무슨 책이 좋을까요?" 사람좋은 웃음으로 늘 맞이해 주던 점원(나중에 나와 친한 선배가 되었다)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광주사태라..."라며 흐릿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책을 권해야 할까? 어떤 책을 읽어 봤어요?" 얼굴이 발개지는 느낌이었다. 사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광주에 대한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었다. 광주는 TV에서 얘기하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태에서 내게 기억되고 있었다. "읽은 책 없는데요. 추천해 주시면 안될까요?" 점원은 조금 생각하더니 내 손을 이끌고 '광주항쟁특집'이라고 작은 종이가 붙어있는 코너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 골라봐요" 고를 필요도 없었다. 내 눈에는 시커먼 표지의 책 한권에 눈에 와 박혔다, "이 책 어때요?" "아... 꽤 좋죠. 광주항쟁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어서 전반적인 상황을 알기에 좋을 꺼에요" 점심 몇 끼니에 해당하는 돈을 주고 이 책을 샀다. 집에 와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책을 읽는 속도는 대단히 느렸다. 나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 전무한 상태였고 그것을 하나하나씩 이해하며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낯선 표현이 많았다. 또한 현재의 상식을 즈려밟는 심정으로 읽어 나가야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왜 싸웠는지 알게 되었을 때 나도 함께 분노했고 그들이 같은 민족의 총칼에 죽어 나뒹굴 때 내 심장도 대검에 찢기는 듯 했다. 그들이 도청을 탈환하고 해방구를 꾸렸을 때 더할 수 없는 환희의 심정이 되었으며 그 순간을 외부로 알리기 위해 노력하며 알 수 없는 두려움을 토로할 때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는 나는 깊은 상심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1980년 5월 광주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광주가 단지 5월 18일의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5월 광주는 한글날이나 광복절이나 개천절과 같은 기념일이 아니다. 단지 그날 무슨 일이 생겼기 때문에 기억해야하는 추모해야하는 그런 날이 아니다. 적어도 내게 5월 광주는 연속적인 사건이며 변화며 투쟁이다. 비록 내가 한권의 책을 통해 5월 광주의 실체를 접하게 되었지만 광주는 내게 그런 것이다.

 

 

이 책 - 죽음을 넘어... -은 황석영씨가 목숨을 걸고 썼다고 한다. 또한 '풀빛'이라는 출판사는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이 책을 출판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고 다른 이들에게 책을 전달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광주를 다시 부활시켰다. 이러한 노력이 1980년 5월 이후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것이 광주사태를 광주항쟁으로 재정의했으며 죽어간 사람들에게 새생명을 부여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후 내게 광주는 더 이상 죽음과 살육과 아비규환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런 이미지를 버리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앞으로 '5월 광주'에 대해 알게 될 사람들도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들은 죽어간 사람들의 사진을 보게 될 것이며, 나를 지켜야 할 총칼이 내게 겨누어진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깊이 분노하게 될 것이다. 학살의 원흉들이 여전히 활보하고 다니는 대한민국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매우 빠르게 현재의 '5월 광주'라는 의미를 되찾게 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보다 빠르게 그런 과정을 진행할 것이다. 내 선배들이, 80년 광주를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현재의 광주를 재해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5월 광주'를 떠 올리며 살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기념하고 추모할 때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광주를 경험한 사람과 광주를 기억하며 싸운 사람과 광주의 수혜를 입은 사람으로써 서로 다르게 만날 것이다. 그리고 매우 빠르게 동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서로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5월 광주를 내보이며 연대의 손을 맞잡게 될 것이다.

 

피없이 주어지는 자유는 없다. 그 피를 먼저 흘린 사람들을 위해 주어진 자유를 더욱 소중하게 지켜내야 한다. 죽음을 넘어서 시대의 어둠을 넘어서 내가 해야할 바를 하라. 광주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2004.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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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쓰인 역사를 의심하고 놀림감으로 삼는 자들에게 무슨 말을 더 해야겠습니까. 똥같은 이야기를 읽기 전에 이 책을 꼭 읽어 볼 것을 권합니다. 이 책 한 권 들고 있다고 백주대낮에 체포되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