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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e Story

근속 연수

오래 전에 잠시 근무했던 한 회사 이야기.

그 회사에 들어간 지 얼마되지 않아 다른 부서 직원들과 이야기를 회식을 했는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다들 그 회사에 들어 온 지 1년이 되지 않았으며 또한 심각하게 회사를 떠날 것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회사 업무가 과도하게 많았고 하는 일에 비해 대가가 낮다고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다음 날 인트라넷에 접속해서 자료를 살펴 보던 중 인사 관련 파일을 볼 수 있었다. 200여 명의 임직원 중 근속 연수가 1년 이상인 직원이 30%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30% 가운데 절반 정도가 병역 특례로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회사의 임원 혹은 어떤 식으로든 회사의 지분과 연관된 사람들이었다. 최초 회사 설립 시 관여한 사람이라든가 그 사람의 부인이라든가 남편이라든가 친인척이라든가 뭐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70%의 사람들은 대개 입사한 지 1년 이내였다. 또한 전년도 퇴직자의 수가 전체 임직원의 20%에 육박할 정도였다. 그 회사는 일년 내도록 상시 채용 공고가 떴고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인터뷰를 하기 위해 사장실 앞에 앉아 있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 회사가 무슨 다단계나 텔레마케팅 혹은 파견 업무를 주업으로 하는 회사는 아니었다. IT 계통의 일을 하는 회사였고 파견가서 일을 하는 경우가 흔하긴 했어도 장기 근속을 할수록 유리해지는 즉, 경험이 풍부할수록 일이 수월해지고 전문성도 높아지는 그런 업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의 임직원의 근속 연수는 이상하리만큼 짧았다. 이후에 여러 회사를 경험하면서 이 회사와 같이 평근 근속 연수가 짧은 회사의 공통점을 조금씩 찾을 수 있었다. 


1. 제멋대로 신상필벌 (信賞必罰)

근속 연수가 낮은 회사의 공통 특성 중 하나는 강도 높은 노동과 낮은 급여였다. 잦은 야근과 철야, 휴일 근무, 불규칙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응하는 적절하고 유동적인 보상은 적었다. 반면 성과 측정을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했는데, 특히 업무 성과를 인사 평가와 직결시키려는 시도가 많았다. 당연히 회사의 일상적인 업무 중 하나는 잘하는 직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는 직원을 찾아 비판하고 엄단하는 것이 되곤 했다. 업무 평가는 늘 어떤 사람이나 조직에 대한 성토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누군가 혹은 어떤 조직이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평가되었다. 물론 그 책임은 대개 근속 연수가 긴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 - 흔히 굴러온 돌이라고 표현한다 - 에게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상은 적고 벌은 많은 조직이었고 그나마 공정하지도 않았다. 


2. 말 많은 사장님

그 회사에서 매주 혹은 매월 전 임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바로 사장님의 길고 지루한 비전과 각오였다. 한 시간의 임직원 회의가 있다면 거의 50분을 사장님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야했다. 욕심쟁이 사장님은 늘 무언가 새로운 것을 임직원들에게 이야기했고 그것에 감동하길 바란 것 같다. 한 번은 나도 모르게 하품을 하다 사장님과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회의가 끝난 후 사장실로 불려가 2시간 가까이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임직원의 근속 연수가 낮은 회사 사장님들은 대개 말이 많다. 


3. 순식간에 퍼지는 소문

그 회사는 임원 회의에 참석해야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직원들이 업무를 시작하기 전 휴게실에서 커피를 같이 마시며 대부분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깜짝 놀랄 일은 거의 없었다.


4. 임기응변도 전략이라면 전략

분명히 한 해 목표를 정했고 그것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하는 지 두 달에 걸친 회의를 통해 꼼꼼히 준비를 했고 여러차례 워크숍을 통해 토론도 했다. 그러나 1월 1일 이후 그 목표대로 진행된 것은 거의 없었다. '거의'라고 표현한 것은 한 해 목표에 "이 목표는 시장 환경에 따라 변화할 수 있음"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은 늘 변하기 때문에 우리의 전략도 늘 변했고 그래서 '거의' 전략에 따라 진행되지 않았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전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번 항과 관련하여 우리의 가장 큰 한 해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은 사장님의 말씀에 따른 임기응변이었던 것 같다.


5.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나를 비롯한 70%의 짧은 근속 연수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늘 우리가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뭐라고 떠들어대지 말고 떠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잠깐 있을 절에서 열심히 염불을 외울 수는 있겠지만 법당을 갈고 닦을 일은 없다. 당연히 절은 황폐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나는 그들을 존중한다. 그리고 내가 그런 회사를 빨리 떠난 것 또한 무척 잘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근속 연수가 긴 사람들이 많은 회사가 무조건 좋은 회사는 아니다. 또한 임직원의 근속 연수가 짧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회사도 아니다. 회사의 주요 사업 부문이 임직원이 오래 버티기 힘든 환경일수도 있다. 그러나 임직원의 다수가 마치 이어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짧은 구간을 전력 질주하고 새로운 사람에게 바통(baton)을 넘기고 퇴사해버리는 일이 반복되는 것은 회사의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회사 자체가 아무리 훌륭한 시스템으로 무장하고 있더라도 인간을 대체할 수는 없다. 훌륭한 인적 자원은 경험과 지식이 시간을 통해 합금되며 탄생한다.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한 개인에게 누적되고 그들이 서로 교류하며 취약한 부문을 보강하고 강한 부문을 집적할 때 비로소 회사는 훌륭한 인적 자원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합금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개개인은 단지 훌륭하거나 뛰어난 사람일 뿐 회사의 인적 자원은 아니다. 그래서 훌륭한 회사를 따질 때 오랜 근속 기간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 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뛰어난 개개인이 오랜 시간 한 조직에 머무르며 합금화의 과정을 통해 충분히 단단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