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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uacu ONLY

미운 친구가 생사를 헤맬 때

오늘 내 인생에 한 가지 질문이 던져 졌다,

"만약 미워했던 친구가 생사를 헤매고 있다고 너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그를 돕기로 했다.






동문 회보

두 달에 한 번씩 대학 동문 회보가 온다. 읽을 거리라곤 오직 '동문 동정' 정도다. 어떤 선배는 영전을 하여 서울로 이동했고 어떤 동기는 해외로 유학을 떠났고, 또 어떤 후배는 두번째 아이를 낳았다는 시시콜콜한 동문들의 사는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있다. 서울에 올라 온 지 10년이 넘었고 동문 모임에 나가지 않기 때문에 동문들의 이야기라곤 오직 회보를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가끔 나타나는 오래 전 기억 속의 사람들 소식을 읽을 때면 묘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번 회보엔 또 어떤 소식이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회보의 뒷 쪽에 있는 '동문 동정'을 먼저 펼쳐 보았다. '동문 동정'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머릿 속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는 잘 알고 있는 한 동기(A군)의 웃는 사진이 실려 있었고 그의 최근 동정이 있었다. 몇 번을 거듭해서 읽었다. 처음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A군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옮겨 놓은 줄 알았다. 그러나 A군의 이야기였다. 그는 올해 6월 부산에 내려가 있다 갑작스럽게 뇌수막염(뇌막염)에 걸려 3개월 가까이 사경을 헤매었다고 한다. 얼마전 추석 무렵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여전히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그 소식을 같은 과의 한 학번 선배가 전하며 곧 치료를 위해 다른 병원으로 옮길텐데 치료비가 걱정이라며 모금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별 망설임없이 회보에 실린 계좌로 지금 내가 보낼 수 있는 돈을 송금했다. 송금을 하고 부산에 있는 동문회 사무실로 전화를 해서 A군의 소식을 묻고 다시 회보에 소식을 올린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도움을 드릴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달라고 말씀 드렸다. 전화를 끊고 작업실의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원래 미운 놈은 건강하게 잘 사는 법인데 이 놈은 왜 저렇게 젊은 나이에 저 꼴이 되었나 싶었다.


미운 친구


A군은 1990년대 초반에 같은 단과 대학에서 학생 운동을 하며 만난 사이다. 그와 나는 처음부터 티격태격하는 사이였다. 특별히 서로 대놓고 싸운 적은 없었지만 토론을 하거나 일상에서 대화를 할 때 항상 상대방에게 뼈 있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학생회 활동을 할 때도 사사건건 부딪치는 일이 많아 나중엔 서로 피하며 일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가 일을 잘 했던 건 분명했고 나도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는데 A군이 딱 그랬다. A군도 말을 안해서 그렇지 내게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졸업을 하고 내가 서울에서 IT 업계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을 때 A군에 대한 소식을 몇 년에 한 번씩 들은 적 있었다. 그는 영화계에 잠깐 있었던 적도 있었는데 동문들은 늘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A군이 저번에 했던 영화가 어쩌구, 이번에 또 뭘 준비하는데 어쩌구...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괜히 기분이 나빠지곤 했다. 내게 뭔가 잘못한 일도 없는데 그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나중엔 내가 그에게 무슨 콤플렉스라도 갖고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올해 초 동문 회보에 그와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최근 새롭게 준비하는 사업에 대해 자신감있게 이야기하는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래, 잘하면 좋은 거지 뭐...'라고 생각했지만 괜히 기분 나빴다. 그랬던 그가 뇌막염에 걸려 쓰러졌고 사경을 헤매다 지금도 사람을 알아 보지 못하고 눈만 꿈뻑이며 병상에 누워 있다고 한다.

내가 왜 그를 미워했나 곰곰히 생각해 봤다. 그는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하며 학과 수업도 잘 듣는 편이었지만 나는 학생회 활동도 그저 그랬고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는 언론 관련 학과 학생답게 미디어의 속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비평도 잘했지만 나는 사회학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고 이론도 잘 몰랐다. 그는 남들보다 빨리 미디어 관련 사업에 진출해서 경험을 쌓기 시작했지만 나는 겨우 IT 벤처 기업에서 뭐하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콤플렉스 맞는 것 같다. 문제는 그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A군과 나를 비교한 적 없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런 이유들 때문에 그를 미워했던 것 같다.


미운 정

A군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미워하며 미운 정을 쌓아 온 것 같다. 오래 전 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고 이후에 그의 사회 생활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 놈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하고 결심했던 것 같다. 그랬던 놈이 쓰러졌다니, 게다가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눈만 멀뚱하게 뜨고 병상에 누워 있다니... 상상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뚱뚱한 몸매 때문에 학교 때도 '남뚱'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녀석이 더 살찐 모습으로 동문 회보에 사진으로 나온 것이 몇 개월 전인데 이제 제 한 몸 가누지 못하고 있다니.

친구야, 제발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길. 이전보다 더 힘찬 모습으로 살아 가길. 그래서 내 미움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미운 친구가 친한 친구보다 더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지난 10년을 보지 못했고 앞으로 또 보지 못해도 관계 없으니 내게 영원히 미운 친구로 남을 수 있게 속히 건강 되찾기 바란다. 네가 그렇게 누워 있으면 내가 너를 미워할 수 없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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