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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윈스럽 폴 록펠러 사망

록펠러 재단 혹은 미국 석유 재벌인 스탠더드오일로 유명한 록펠러가의 증손자인 윈스럽 폴 록펠러 2세, 아칸소주 주지사가 사망했다. 록펠러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의 설립 배경에는 록펠러가(家)의 기업 이미지 변신을 위한 백여 년에 달하는 노력이 베여 있다. 록펠러가는 미국 석유 재벌의 대표로써 노동 착취와 악덕 기업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1970년 대까지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John Davison Rockefeller(1839~1937)는 스탠더드오일로 일약 미국 최고의 갑부가 되었지만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의 후손 또한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록펠러는 석유 제국을 구축하기 위해 각종 노동 탄압과 합법적 악행을 일삼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클리블랜드의 대학살>이었다. 이 사건 이후 록펠러는 ‘악의 화신’으로 꼽혔다. 록펠러재단을 만든 이유 중 하나가 기업의 이미지 쇄신을 위한 것임은 자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록펠러재단이 수립된 1913년은 록펠러에게 또 다른 악의 이미지를 심어 준 해였다. 1913년 미국 콜로라도주 탄광에서 광원 9000여명이 형편없는 작업환경을 견디다 못해 파업을 일으켰다. 회사가 고용한 무장 구사대와 광원들이 충돌하면서 파업은 1년 넘게 끌었다. 이듬해 민병대가 광원들이 머물던 천막촌을 기습해 불을 지르고 기관총을 쏘아댔다.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50여명이 죽었다.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참혹한 ‘러드로의 학살’이다. 이 탄광의 소유주가 존 데이비슨 록펠러였다. (출처 : 여기저기)


오래 전 어떤 책에서 록펠러 일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악덕 기업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노력했어야 했나를 기술한 것을 본 일이 있다. 거의 백 년 가까운 시간을 미국 사회를 위해 헌신했고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록펠러 가는 선대의 악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록펠러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비교적 재벌들에게 호의적인 이미지를 많이 갖고 있다. 물론 그런 이미지가 모두 진실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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