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Iguacu ONLY

한강 자전거로 달리기, 무한도전

집 앞 복도에 자전거가 한 대 놓여 있다. 이 놈을 산 지 거의 1년이 되어 가는데 지금까지 타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출퇴근할 때마다 자전거를 보며 '이번 주는 꼭 타야지'라고 생각만 했다. 그러면서 안 탄지 8개월은 넘은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오늘은 반드시 타고 말겠다는 결심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4시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1. 제대로 타는 분들의 공식 패션>

옷을 갈아 입었다. 오늘은 꽤 덥기 때문에 반팔 티셔츠를 입기로 했다. 뒤적이다보니 사이즈 100의 쫄티가 눈에 띈다. 작년 가을쯤 중국에서 디자인 사업한다는 동생이 선물로 보내 온 것이다. 입어 봤다. 배가 뽈록하게 보였다. 팔은 가늘고 배는 뽈록한 것이 올챙이 같았다. 다른 옷을 찾아봤는데 아직 여름 옷을 꺼내 놓지 않아 마땅한 것이 없었다. 배에 힘을 줘 봤다. 조금 괜찮아 보인다. 스스로 암시를 걸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밥을 먹어서 배가 더 튀어 나와 보이는 거야', '자전거 타면 웬만한 똥배는 보이지 않을 거야', '잠깐 쉴 때는 배에 힘주고 있으면 되는 거지' 한 오분 정도 거울을 보며 암시를 걸었다. 오케이.

지난 번 자전거를 탈 때 경험을 생각해 보니 햇살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익었던 것 같다. 지난 주말 야구장 가서 샀던 두산 베어즈 야구 모자를 쓰기로 했다. 나는 롯데 팬이다. 그냥 야구장 가면 모자 하나 사야할 것 같아 산 건데 이럴 때 쓸모가 있다. 지난 주에 1루 지정석에 앉아서 별로 친하지도 않은 두산 베어즈 응원했는데 5:2로 LG 트윈스에 졌다. 7회 말에 그냥 나오길 잘했지.

바지... 지난 번 자전거를 탈 때 경험을 생각해 보니 가능하면 바지는 달라 붙는 스타일에 면 소재가 좋다. 뒤적여 봤다. 없다. 그냥 청바지 입기로 한다.

끝으로 팬티... 지난 번 자전거를 탈 때 경험을 생각해 볼 때 사각 팬티를 입었다 개고생을 했다. 땀이 나자 팬티가 말려 올라가고 심지어 항문에 끼이는 사태까지 벌어져 자주 내려서 주변 사람이 안 보이게 팬티를 내리고다 '제자리 뜀뛰기'나 '바지 주머니에 손 넣어 팬티 내리기'를 했었다. 이번엔 삼각 팬티를 입기로 했다. 팬티를 꺼냈다. 아... 작다. 아니다 내가 살이 찐 것이겠지. 나는 가끔 아직도 내가 잘 꾸미면 젊어 보일 수도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왜 100 사이즈 삼각 팬티를 10개나 샀냐고... 할 수 없다. 입어야지. 입고 나니 단전 부위와 사타구니에 강력한 파워가 느껴진다. 이 팬티 입고 복식 호흡 자주 하면 공중 부양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 편하게 사각 팬티 입고 10분에 한 번씩 제자리 뜀뛰기를 하느냐, 강력한 압박을 참고 삼각 팬티를 입느냐 잠깐 고민하다 다시 갈아 입기 귀찮아 그냥 삼각 팬티 입었다.

대충 준비가 끝났다. 글이 길어서 그렇지 옷 고르고 입는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실 옷장에 있는 옷 중 손에 잡히는데로 입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4시 5분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2. 내 열쇠는... 내 열쇠는...>

옷을 다 입었으니 이제 자전거를 타러 가야지. 신발을 신고 문을 열고 자전거를 끌고 가려는데 자전거 자물쇠가 보인다. 열쇠 찾아야지. 항상 - 그러니까 8개월 전 - 문 바로 옆에 있는 책장에 열쇠를 두곤 했기에 찾아 봤는데 없다. 탄 지 오래되었으니 가족 중 누군가 치웠을 지 모른다 생각하여 전화를 해서 물어봤지만 모른다고 한다. 이럴 때 긴장하면 안된다. 긴장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을 잘 찾기 못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4시 35분


아, 이런 개노무 열쇠가 어디 있는거야! 책장을 전부 엎어서 찾아 보고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어 보고 약 8개월 전에 입었던 옷이란 옷은 다 꺼내서 주머니를 뒤져 봤지만 열쇠는 찾을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가을 옷에 있던 현금 7천원을 찾을 수 있었다. 세탁기를 통과한 후 바로 겨울 옷장으로 향하여 미라가 되어 있는 담배 한 갑도 찾을 수 있었다. 어쨌든 열쇠는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자물쇠를 열 수 없을까 싶어 궁리를 해 봤다. 확 당겨 버리면 열리지 않을까? 불에 달군후 얼음물을 붓고 망치로 갈겨 버리면 깨지지 않을까? 자전거 바퀴를 분해하면 되지 않을까? 이런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계시가 내려왔다,

"지식in에 물어 보아요~"

컴퓨터 켜고 네이버 접속하고 지식in에 질문했다,

"자전거 자물쇠 분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3. 지식in을 통한 공감대, 열쇠는 항상 여러 바구니에 나눠 담는 지혜가...>

나 같은 인간이 꽤 있나 보다. 답변을 몇 개 읽어 봤다. 나 같은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나 보다. 별 다른 대안이 없다. 가장 많은 대답은 커터를 빌려와서 끊어 버리거나 줄톱을 사서 잘라 보라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4시 50분


동네 E마트 공구 코너 앞. 줄톱이 있다. <다기능 요술톱>이란다. 9,800원. 그런데 바로 옆을 보니 비슷하게 생겼지만 어딘지 모르게 싼티가 좔좔 흐르는 줄톱이 있다, 3,200원. 어차피 이런 물건 한 번 사면 다음 번엔 언제 쓸 지 알 수 없다. 우리 집에도 이런 저런 목적으로 산 공구가 몇 개 있는데 지금까지 손톱깎이를 제외하고 두 번 이상 사용해 본 경험이 없다. 과거 실패 경험에 기초해서 이번엔 한 번만 쓸 수 있는 놈으로 사기로 했다. 9,800원 짜리를 샀다. 나도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추측만 할 뿐이다. 그리고 3,300원짜리 새로운 자전거 자물쇠를 샀다. 이번엔 번호 입력 방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번호를 잊어 버리면 낭패라고 걱정하는데 그럴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초기 비밀번호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0000". 자전거 도둑들의 발상을 뒤엎는 반전 전략인 것이다. 설마 초기 비밀번호를 그대로 쓰리라 생각하는 자전거 도둑이 많겠는가... 자전거 도둑들이 의외로 지적 수준이 낮아 "0000"을 제일 처음 시도해 보는 경우가 많다면 큰 문제긴 하다. 사실 가위바위보 놀이를 할 때도 나는 앞으로 열 두 수를 예측해서 가위를 냈는데 상대방은 바로 이전에 보를 냈으니 이번엔 바위를 내야지 하는 바람에 지는 경우가 흔하지 않나. 아... 머리 아프다. 지문 인식 자전거 자물쇠는 없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4. 지문인식 도어록. 뭐 자전거 값보다 비싸도 관계없다면 가능>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4시 55분


E마트에서 나오는 길에 아직도 점심을 먹지 않은 게 생각났다. 햄버거 세트를 샀다. 엄청난 열량임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타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4시 58분



계산대 앞. 순간적인 잔머리를 굴려 줄이 가장 짧은 곳은 선택했는데 앞에 있던 아줌마 아저씨가 계산원과 만담을 나누고 있다. 이건 왜 오케이캐시백이 안되요? 현금 영수증 카드가 어디 있지? 저건 빼 주세요, 아니다 다시 포함시켜 주세요. 여보, 자기 돈 좀 없어? 모자라네... 옆 줄에 다섯 명 서 있던 곳은 이미 계산 끝났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햄버거 식어! 콜라 얼음 다 녹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5시 10분



햄버거 다 식었고 콜라 얼음 다 녹았다. 다른 기대를 만들어야 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줄톱을 꺼냈다. 아까 그 지식in의 답변에 의하면 커터를 쓰면 단 번에 잘리지만 줄톱으로 자르면 몇 시간 동안 해야 할 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한 번 톱질을 해 봤다. 수백개의 쇠줄이 꼬여 있어서 자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때 번개같이 떠 오른 생각...은 아니고 원래 그러려고 했다. 줄 부분이 아니라 자물쇠가 잠기는 부분을 자르는 것이다. 약간의 틈 사이로 줄톱을 밀어 넣고 그야말로 마구 톱질을 했다. 영화 <넘버 3>의 한 장면과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5. 넘버 3의 송강호 형님 대사, 형님 사투리 교정은 포기했죠?>
"너, 존슨이냐? 나 최영의다! 무조건 걸어가는거야! 죤슨이 겁나니까,  팔로  막거든. 그럼 **끼야, 팔은 니살 아니냐? 하면서 또 *나게 내려치는거야. 팔을 치울때까지...


"너... 자물쇠야? 나 막장이야! 무조건 톱질하는 거야! 자물쇠도 겁나니까, 게기거든? 그럼 야이 싸구려 옵션 자물쇠야, 니 쇠는 쇠 아니야? 하면서 또 빛나게 톱질하는 거야. 잘릴 때까지..."


약 5분 가량 미친 듯 톱질을 했다. 일단 줄톱은 끄덕없었다. 잘린 상태를 보니 충분히 잘릴 가능성이 보였다. 안심이 되었다. 집으로 들어와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뭐 어차피 잘릴 것이고 내일 잘리듯 오늘 잘리듯 어차피 잘릴 것 아닌가? 잘리면 자전거 몰고 다니며 운동하면 되니까 먹자. 다 먹었다. 잠 온다. 자전거 타지 말까? 어차피 내일 토요일인데, 내일 탈까? 소파에 누워 있으니 참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났다. 인생 뭐 별 거 있다고 저 하찮은 사은품 자물쇠를 자르기 위해 이렇게 집중을 해야 하나 싶다. 일단 자물쇠 자르기는 시작한 일이니 마무리를 하고 자전거 타기는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5시 20분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6. 제 자전거에 장착된 자물쇠, 색깔만 다르고 완벽히 같음. 저 놈의 열쇠는 어디에...>

흐뭇한 마음으로 잘라 낸 자전거 자물쇠를 보고 있다. 몇 시간은 개뿔, 25분 만에 잘라 냈다. 그런데 톱질을 한 건 오른팔인데 왜 받치고 있던 왼팔이 이렇게 아픈 거지? 아름답게 잘린 자물쇠의 단면을 보니 왜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건지... 자랑할 사람 없나... 그래, 자전거 가게 아저씨에게 자랑을 해야겠구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5시 40분


8개월 만에 자전거 가게를 찾았다, 자전거 사고 나서 인터넷에서 조회해보니 거금 3만원을 털어 먹었지만 뭐 소매점이 다 그러려니 생각했다. 동네 장사니 그 정도는 봐줘야지 않을까? 어쨌든 이런 저런 구실로 그 3만원을 빼 먹어야 하는데... 한 손에 잘라낸 자전거 자물쇠를 들고 가게에 갔다. 그런데... 아저씨가 자리에 없다. 왜 자리에 없냐고 버럭 화를 냈더니 다른 직원이 그런다, "밥 먹으러 갔어요." 저녁 다 되어서 무슨 얼어죽을 밥! 신경질나서 쓰레기통에 자물쇠를 버리고 앞 바퀴와 뒷 바퀴에 공기를 넣었다. 8개월 동안 그냥 내버려뒀더니 공기가 빠져 있었다. 바로 옆에 2호선 대림역이 보인다. 대림 역 아래로 안양천을 따라 난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있다. 이왕 바깥으로 나왔으니 해질녘이지만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기로 한다. 한 시간이면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까지 갔다가 돌아 올 시간은 충분히 될 것이다. 8개월 전처럼 여의도까지 갔다가 체력 고갈로 돌아 오는데 2시간이 걸렸던 과오는 반복하지 않기로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7. 구로디지털단지역 근방이 우리 집. 안양천을 끼고 30분 달려야 함>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6시 10분


안양천이 왜 이렇게 긴거야! 체력이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다. 큰 일이다. 그냥 돌아갈까? 아니다... 이정표를 보니 목표가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쓍! 이게 뭔가? 바로 옆으로 언뜻 봐도 비싸 보이는 자전거를 타고 제대로 복장 갖춘 라이더(그냥 라이더라고 하자, 간지 나지 않나)가 지나간다. 똑같이 패달질 하고 있는데 저 쪽 속도가 훨씬 빠르다. 하긴 10만원 초반대 싸구려 자전거 특히 무겁기로 자전거 업계에서 소문이 자자한 중국산 자전거를 타고 있는 상황이니 뭐 어쩌겠나...라고 생각하고 몸은 자전거 기어를 조정하고 미친듯이 패달질을 한다. '잡히면 죽는다!'

님은 저 멀리... 참 잘 달린다. 역시 기종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갑자기 근처 동네에서 저녁에 놀러 나온 사람처럼 굴기 시작한다. 휫파람도 불고 '아 상쾌해라'라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패달질을 한다. 포기는 빠를수록 인생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다음 달 봉급으로 초울트라 가볍고 드럽게 비싼 자전거를 확 사 버릴까 고민한다. 새 자전거 사면 양민 자전거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꼭 앞질러가며 가볍게 이렇게 이야기해야겠다, "아, 이건 패달질이 느껴지지도 않는구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8. GIANT의 "TDF TCR1000" 자전거. 판매가 3천만원짜리 자전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6시 15분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9. 속도에는 엉덩이 세우기가 기본>

조금만 더 가면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속도를 올리기 위해 엉덩이를 들고 패달질을 한다. 소위 프로들만 한다는 "가속을 위한 자세"를 취한 것이다. 갑자기 얼굴에 뭔가 파다다닥 부딪치기 시작한다. 그렇다, 하천 주변에 항상 창궐하는 그들, 날파리떼의 급습이다. 비로소 8개월 전 상황이 떠 올랐다. 신나게 자전거 타러 나왔다가 씹어 삼킨 날파리가 몇 마리이며 그 때도 '다음에 나올 때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선글라스랑 머플러로 입을 가려야지'라고 결심했었다. 또 까먹은 것이다.

사실 그들이 급습한 것이 아니라 내가 빨리 달리는 바람에 날파리떼에 내가 가서 부딪친 셈이다. 그래서 천천히 달리기로 했다. 천천히 달렸더니 이젠 날파리떼가 얼굴에 붙어 버렸다. 할 수 없이 담배를 피면서 달렸다.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며 뭐라고 그러는 것 같다. 나는 그냥 '방역 차원'에서 그런 것 뿐인데... 자전거를 타며 담배를 피면 안된다. 굉장히 몰상식한 일이고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 그냥 농담으로 한 소리다. 더구나 자전거를 타고 담배를 피면 바람에 의해 담배가 빨리 타기 때문에 비용 대비 효과도 별로 없다. 물론 뒤에 따라 오는 사람을 엿 먹이고 싶을 때는 해도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6시 20분



드디어 도착했다!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바로 그 지점. 한강이 넓어서 그런지 더 이상 날파리는 없다. 확 트인 한강을 바라 보니 너무 기분이 좋다. 해는 거의 넘어 갔지만 아직 사물을 분명히 볼 정도다. 한강을 따라 이어져 있는 자전거 전용 도로에는 늘 사람들이 많지만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 지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는 넓은 공간이 있어서 자전거나 인라인,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한강을 바라보며 쉴 수 있다. 나도 그 자리에 앉아 잠깐 쉬며 한강을 구경했다. 맞은 편으로 보이는 과거 난지도 매립지(현재 난지도 한강 공원)는 이제 생태 공원과 시민 야영장, 시민 골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나는 과거의 난지도를 모르지만 그걸 아는 사람들은 푸르른 난지도를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목이 마르다. 주변에 물을 파는 곳이 있는 지 자전거에 오르려는 노인에게 물었다. 저 밑에 보이는 다리 (성산 대교) 근처부터 가게가 줄을 섰다고 했다. 8개월 전 내 기억에도 그렇다. 달려 보기로 했다. 물만 먹고 집에 가야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6시 25분



음료수를 샀다. 마셨다. 기운이 좀 난다. 더 달려 보기로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7시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10. 전립선의 위치, 부끄러워하긴... 이미지는 생물학 교본에서 추출한 것임>

여기가 어디지? 모르겠다. 엉덩이가 아파온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립선 부근이 미친 듯 아파온다. '여의도 기점 5km'라는 표지가 보인다. 여의도... 그래,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는 모든 사람들의 오아시스, 여의도. 가야지... 여의도... 우리는 거길 가야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7시 10분


여의도고 나발이고 전립선이 찢어진 것 같다. 자전거를 버리고 싶다. 그런데 내릴 수 없다. 내리면 다시는 자전거를 못 탈 것 같다. 갑자기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 올랐다, '사이클 선수들은 전립선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애도 잘 못 갖는다고 한다' 두렵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일 것이라고 자위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7시 20분



패달질은 계속하고 있다. 자전거 도로 주변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금요일 저녁 한강변에서 산책도 하고 축구도 하고 야외 회식도 하는 사람들이다. 즐겁게 웃는 모습과 포근하게 연인의 어깨를 감싸 안는 모습도 보인다. 다 죽여 버리고 싶다! 내 전립선, 내 전립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7시 40분



자전거에서 내렸다. 근처 가게에 가서 주인 아줌마에게 "혹시 진통제 파세요?"라고 물었다. "훼스탈이요?"라고 한다. 그냥 맥주 하나 달라고 했다. 원샷으로 마셨다. 하나 더 마셨다. 오줌 마렵다. 순간 전립선의 고통이 사라진 것 같다. 그래,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여의도는 가야지!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7시 42분



이젠 오줌도 마렵고 전립선도 아프다. 눈도 침침해 지는 것 같다. 왜 한강 자전거 도로에는 응급실이 없는 것인가. 여기 한 사람이 고통에 빠져 있다, 왜 서울시는 이런 사람을 위한 대처를 하지 않는 것인가? 오세훈은 시민이 전립선의 고통에 빠져 있는 동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8시 10분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11. 어무이!!!! ㅜ.ㅜ>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나는 지금 63빌딩을 뒤로 하고 좌 마포대교, 우 원효대교가 있는 한강 유람선 선착장에 있다. 오후 5시 40분 경 시작한 대장정은 2시간 30분만에 결국 목표 지점에 도착하고 만 것이다. 유홍길 대장이 부럽지 않다. 유홍길 대장도 전립선의 고통을 2시간 넘게 견디며 패달질을 해야 하는 미션을 받았다면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러다 애도 못 만들고 전립선 파열로 막장 인생이 된다면 과연 그는 산에 오를 수 있었을까? 이 놀라운 도전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캔 커피를 마셨다. 특별히 1000원짜리 헤이즐럿 캔 커피를 마셨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12. 장미희 누님의 말씀, "아름다운 밤이에요~">

내 주변으로 평화로운 금요일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언제나 이 주변을 오면 볼 수 있는 정체 모를 외국어를 사용하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있었고, 아무리 봐도 딸과 아빠 관계인 남녀가 서로의 볼을 쓰다듬으며 아름다운 부녀간 애정을 확인하는 장면도 보였고, 선선한 강 바람 맞으며 20여 명의 회사원들이 소주 잔을 나누며 '성실, 신의, 공경'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인터넷 대부 서비스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한강은 그런 모든 이야기를 다 받아 들이고 또한 다 흘려 버리며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8시 30분


이제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8개월 전 집으로 돌아왔던 길을 떠 올려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길보다 더 나은 길이 있지 않을까? 지난 번엔 마포 대교를 넘어 집으로 왔지만 이번엔 다른 길에 도전해 보는 게 어떨까? 인생은 도전의 반복이잖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9시



인생은 삽질의 연속이다. 이거 뭐 길이 끝이 없잖아? 왔던 길 다시 돌아가기로 한다.

* 한강 자전거 도로는 뚝섬을 지나 잠실대교를 지나 암사동까지 이어진다. 난 그 사실을 몰랐고 잠수교까지 갔다. 이렇게 가다 죽을 것 같아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9시 15분



한강 대교 아래. 자전거에 내려 한강 대교 아래에 서 있었다. 지하철이 지나간다. 소리가 무섭게 크다. 한강 대교 위를 자주 지나가 봤지만 그 아래에 서 있기는 처음이다. 검은 한강과 굉음을 내는 전철이 지나는 소리를 들으니 무섭기도 하다. 죄지은 게 많아서 그런가 보다. 한국전쟁 때 이 철교를 파괴했고 그 파괴된 사이를 목숨을 걸고 피난민들이 넘어 왔다고 한다. 아직도 이 다리는 존재하고 있다. 아마 서울에서 가장 사연이 많은 다리가 바로 한강 대교가 아닐까 한다. 한강 대교 아래에 서 있으니 내 인생의 사연은 참 별 것 아니다 싶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9시 30분



딴에는 머리를 쓴다고 집에 더 빨리 오기 위해 원효 대교를 넘어 방배역에서 자전거 전용 도로를 탈 생각이었다. 그런데 방배역에 도착해서 근처를 쏘다녀봐도 자전거 전용 도로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한참을 찾다 방배역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저씨에게 물어 봤다, "아저씨, 방배역이 2호선이죠?" 그러자 아저씨가 대답했다, "1호선"

자전거 버리고 지하철 타고 집에 갈까?

아저씨는 내 몰골에 관심을 보이며 어디서 출발했냐, 왜 야간 전조등이 없냐는 질문을 했다. 나는 "아침에 수원에서 출발했고 낮에 도착할 것 같아서 전조등을 달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거짓말했다. 이 시점에서 내 정신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덕분에 거짓말에 대한 부담도 없엇다. 좀 더 정신력이 떨어졌다면 아저씨에게 "다음 세대 재단과 함께 유가 정상화를 위한 전국 일주 캠페인 중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알게 뭔가! 나는 단지 왜 방배역이 1호선인가에 대해 스스로 분개하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9시 35분



자전거를 질질 끌고 방배역 지하도를 내려가고 있다. 지하철의 지도를 살펴 보니 어쨌든 이 곳을 넘어가면 강남이고 20분 정도만 더 달리면 집이다. 자전거를 끌고 내려가니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본다. 이런 시선은 정말 싫다. 한 손으로 자전거를 번쩍 들었다. 태연한 표정으로 108 계단을 자전거를 들고 내려갔다. 드럽게 무거웠다. 팔이 부들 부들 떨렸다. 계단을 다 내려와 자전거를 내려 놓는데 앞에 또 계단이 보인다. 확 그냥 욕이 튀어 나오려고 했다. 근데 자세히 보니 계단이 아니라 계단처럼 보이는 바닥이었다. 정말 눈이 침침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지하도에서 노점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아저씨에게 "어떤 출구로 나가야 제 집으로 갈 수 있냐?"고 물었다. 무조건 3번 출구로 나가서 직진하면 된단다. 대답과 함께 아저씨는 내 자전거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했다. 자신도 똑같은 자전거가 있었는데 어제 도난을 당했다며 자전거 타기에 좋은 날씨라고 그랬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이미 3번 출구로 나가고 있었다. 사람이 피곤하고 심신이 막장 모드가 되면 예의고 뭐고 없다. 이제 정신이 돌아오니 진심으로 그 아저씨께 고맙다는 말씀 전하고 싶고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9시 45분



나는 지금 보라매 공원 주변 어딘가에 있다. 솔직히 동서남북 분간도 안된다. 한참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골목으로 가면 더 빠를 것 같아 골목으로 들어 왔는데 막다른 길이다. 큰 길로 나가려고 돌아가는데 가는 길에 또 다른 골목으로 갔더니 또 막다른 길이다. 그런 짓을 몇 번 하고 나니 이제 큰 길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맞은 편에 여중생 두명이 갑자기 "까약!"하고 소리를 지른다. 왜 소리를 질렀을까? 난 아무것도 한 일 없다. 그냥 너무 길을 찾기 힘들어서 "에이씨!"라고 소리를 좀 질렀을 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10시 10분



집 앞 편의점. 배도 고프고 목도 말라 들어갔더니 평소 자주 보는 편의점 사장이 어디 놀러 갔다 왔냐고 묻는다. 자전거 타고 왔다고 그랬더니 내 자전거를 보며 "저 무거운 자전거로 고생 많았겠다"고 하며 "자전거는 40~50만원 정도는 되야 타는 맛이 난다고 한다". 계산이나 하라고 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래 1시간이었던 자전거 운동은 여행이 되어 버렸다.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 단지역에서 시작해서 5시간 동안 30Km 가까이 쏘다닌 여행이 되어 버렸다. 8개월 전에도 그랬듯 이놈의 자전거는 한 번 타면 모든 에너지가 고갈될 때까지 타게 되는 것 같다. 시간대 별로 이야기를 하며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했고 그건 사실이다. 평소 운동을 워낙 하지 않으니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5시간 가까이 자전거를 계속 탄 이유는 뭘까?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는 주변의 사람을 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지 못한 훨씬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자전거 타기를 멈출 수 없었다.

여의도에 오는 동안 퇴근 시간에 극심한 교통 정체로 인해 천천히 움직이는 자동차 대열을 봤다. 나는 한강의 바람을 맞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느낄 수 없었던 행복이었다. 1천만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서울 한 복판에서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고 또 다른 상념에 빠질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훌륭한 일이다. 한강과 자전거는 그런 기쁨을 준다. 아마 나는 또 8개월 있다 자전거를 탈 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의 경험을 잊지 못해서 8개월 뒤에는 꼭 자전거를 탈 것이다.

뭔가 멋진 경험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강 자전거 도로를 달려 보라. 전립선의 고통만 빼면 정말 할만한 일이다.